골목길 Cafe phil과 독일어
문을 열고 들어서니 겹겹이 쌓인 책들이 반겨줍니다. 비엔나의 추운 골목을 걸어 이곳까지 찾아와 준 게 고맙다는 듯이요. 밤의 카페에 걸맞는 어둑어둑한 조명 그리고 아늑한 소파 자리는 꽁꽁 언 우리들을 따뜻하게 덥혀주네요. 사람들은 제각기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긴 밤을 지새울 듯이, 와인 한 잔 커피 한 잔에 담긴 오늘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풀어내고 있습니다. 낮에 가도 좋고, 밤에 가면 더욱 좋은- 독일어로 된 책이 가득한 공간, Cafe Phil입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쓰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처음 교환학생을 오기로 했을 때 아는 독일어라곤 'Ich liebe dich(이히 리베 디히-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밖에 없었습니다. 문장에 음을 붙이면 잘 외워진다는 말이 맞는지, 어렸을 적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의 첫 구절이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맴도는 거예요. 그 흔한 'Guten tag(구텐 탁)'조차 아침인사인지, 저녁인사인지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교환학생을 가면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곤 하지만, 딱히 그럴 마음이 들진 않았습니다. 길거리나 마트, 박물관 어디를 가도 영어가 잘 통하는 이 나라에서 굳이 독일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비엔나에서 2주쯤 지내다 보니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독일어로 말을 걸어오는 분들께, '미안해요, 저는 독일어를 못해요.'라고 매번 말하는 것이 꼭 '미안해요, 저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느낌일 때가요. 어쩌면, '당신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고 있지 않아요'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말소리들- 지하철의 안내방송,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 섞인 수다,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까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 도시에서 한 발짝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죠.
하나의 세계에 성큼 다가서 놓고는, 방식을 알지조차 못한 채 이곳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대기는 싫었습니다. 나는 비엔나의 소리들 그리고 글자들에 온전히 물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 그제서야 비로소 비엔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 같았습니다. 조금씩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고, 아는 단어가 꽤 많이 생겼습니다. 장을 볼 때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드문드문 이해하는 말들이 생겼죠.
Cafe Phil에는 동화책이 정말 많습니다. 빨간색, 초록색 등으로 알록달록 칠해져 글보다는 그림이 더 눈에 들어오는 그런 동화책들이요.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책을 펼쳐 들었지만, 아직은 대부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듬더듬 한 글자씩 읽어나가면서, 아직 독일어의 0.1%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시 언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에 한 달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던 거겠죠?
부끄러웠지만, 책을 덮으며 두 달 후 다시 오기로 마음먹습니다. 올 때마다 내가 알 수 있는 세계가 조금씩 넓어진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경험일 거예요. 그즈음이면 크리스마스일텐데, 어쩌면 카페에서 들려오는 캐롤 노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알고 있던 Ich liebe dich라는 말을 곱씹어봅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꽤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는 것은 쉽지만, 이 말 한마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Lieben(사랑하다)'이라는 단어가 'Ich(나)'를 만나면 형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du(너)'라는 단어가 왜 'dich'로 바뀌는지 등의 조금은 머리 아픈 규칙을 배워야 하죠. 어렵지만, 독일어가 가진 규칙을 이해하고 나서 비로소 내뱉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분명히 예전과는 의미가 다를 거예요.
독일어를 배우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언어를 배우는 일. 아는 척만 하는 것보다는, 어렵고 오래 걸리더라도 당신의 언어-당신만의 방식, 시선, 태도, 감정-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낯선 언어로 된 동화책을 읽듯 겸손한 자세로 천천히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서요. 언어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비엔나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처럼, 그때서야 진심으로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미있게도, Cafe Phil의 메뉴판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Life is too short to learn German'. 독일어를 공부하는 친구와 이 메뉴판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맞아요. 하나의 언어를 배우기에 인생은 너무 짧죠. 우리가 이미 쓰고 있는 언어조차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걸요. 한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일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던가요. 10월이 가고, 11월이 가고, 12월이 돌아와 이 곳을 떠날 때쯤이면, 나는 비엔나를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될까요? 어려웠던 동화책을 덮고 Cafe Phil을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읽어야 할 책이 정말 많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