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행성 Oct 30. 2020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기로 했습니다

골목길 Cafe phil과 독일어

나는 비엔나의 소리들 그리고 글자들에 온전히 물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겹겹이 쌓인 책들이 반겨줍니다. 비엔나의 추운 골목을 걸어 이곳까지 찾아와 준 게 고맙다는 듯이요. 밤의 카페에 걸맞는 어둑어둑한 조명 그리고 아늑한 소파 자리는 꽁꽁 언 우리들을 따뜻하게 덥혀주네요. 사람들은 제각기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긴 밤을 지새울 듯이, 와인 한 잔 커피 한 잔에 담긴 오늘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풀어내고 있습니다. 낮에 가도 좋고, 밤에 가면 더욱 좋은- 독일어로 된 책이 가득한 공간, Cafe Phil입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쓰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처음 교환학생을 오기로 했을 때 아는 독일어라곤 'Ich liebe dich(이히 리베 디히-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밖에 없었습니다. 문장에 음을 붙이면 잘 외워진다는 말이 맞는지, 어렸을 적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의 첫 구절이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맴도는 거예요. 그 흔한 'Guten tag(구텐 탁)'조차 아침인사인지, 저녁인사인지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교환학생을 가면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곤 하지만, 딱히 그럴 마음이 들진 않았습니다. 길거리나 마트, 박물관 어디를 가도 영어가 잘 통하는 이 나라에서 굳이 독일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비엔나에서 2주쯤 지내다 보니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독일어로 말을 걸어오는 분들께, '미안해요, 저는 독일어를 못해요.'라고 매번 말하는 것이 꼭 '미안해요, 저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느낌일 때가요. 어쩌면, '당신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고 있지 않아요'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말소리들- 지하철의 안내방송,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 섞인 수다,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까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 도시에서 한 발짝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죠. 


하나의 세계에 성큼 다가서 놓고는, 방식을 알지조차 못한 채 이곳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대기는 싫었습니다. 나는 비엔나의 소리들 그리고 글자들에 온전히 물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 그제서야 비로소 비엔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 같았습니다. 조금씩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고, 아는 단어가 꽤 많이 생겼습니다. 장을 볼 때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드문드문 이해하는 말들이 생겼죠.


낯선 언어로 된 동화책을 읽듯 겸손한 자세로 천천히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서요.


Cafe Phil에는 동화책이 정말 많습니다. 빨간색, 초록색 등으로 알록달록 칠해져 글보다는 그림이 더 눈에 들어오는 그런 동화책들이요.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책을 펼쳐 들었지만, 아직은 대부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듬더듬 한 글자씩 읽어나가면서, 아직 독일어의 0.1%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시 언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에 한 달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던 거겠죠? 


부끄러웠지만, 책을 덮으며 두 달 후 다시 오기로 마음먹습니다. 올 때마다 내가 알 수 있는 세계가 조금씩 넓어진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경험일 거예요. 그즈음이면 크리스마스일텐데, 어쩌면 카페에서 들려오는 캐롤 노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알고 있던 Ich liebe dich라는 말을 곱씹어봅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꽤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는 것은 쉽지만, 이 말 한마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Lieben(사랑하다)'이라는 단어가 'Ich(나)'를 만나면 형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du(너)'라는 단어가 왜 'dich'로 바뀌는지 등의 조금은 머리 아픈 규칙을 배워야 하죠. 어렵지만, 독일어가 가진 규칙을 이해하고 나서 비로소 내뱉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분명히 예전과는 의미가 다를 거예요. 


독일어를 배우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언어를 배우는 일. 아는 척만 하는 것보다는, 어렵고 오래 걸리더라도 당신의 언어-당신만의 방식, 시선, 태도, 감정-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낯선 언어로 된 동화책을 읽듯 겸손한 자세로 천천히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서요. 언어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비엔나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처럼, 그때서야 진심으로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일 거예요.


재미있게도, Cafe Phil의 메뉴판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Life is too short to learn German'. 독일어를 공부하는 친구와 이 메뉴판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맞아요. 하나의 언어를 배우기에 인생은 너무 짧죠. 우리가 이미 쓰고 있는 언어조차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걸요. 한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일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던가요. 10월이 가고, 11월이 가고, 12월이 돌아와 이 곳을 떠날 때쯤이면, 나는 비엔나를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될까요? 어려웠던 동화책을 덮고 Cafe Phil을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읽어야 할 책이 정말 많을 거야.'



이전 05화 비엔나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