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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행성 Jun 24. 2021

여름 뜨개질

나는 아무 취향도 거부도 없이 당신의 이야기를 찬찬히 엮을 뿐입니다

시간 괜찮으세요. 잠시 뜨개질을 하러 들렀습니다. 차를 내려올까요, 하며 당신은 익숙하다는 듯 웃습니다. 날이 더우니 얼음을 띄워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은 낡은 실을 꺼내볼까요. 당신과 뜨개질을 하는 동안 심심하면 몇 번이고 풀었다 다시 매어 지겹게 닳아버린 이야기지만, 뻣뻣하지 않아 뜨기엔 편할 겁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차를 내어오면 내가 할 일은 당신의 입술 주름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입니다. 당신이 아, 하고 입을 벌리면 한 코, 당신이 음, 하고 미간을 찌푸리면 또 한 코. 난로가에 자작이며 타오르는 불빛처럼 당신의 얼굴 위로 붉게 내리는 여름 석양을 응시하며, 나는 아무 취향도 거부도 없이 당신이 자아내는 이야기를 찬찬히 엮을 뿐입니다. 오늘 당신의 말씨는 어떤 모양으로 뜨여질까요. 내가 오래도록 두르기에 적당히 무거울까요, 너무 까슬해서 아프진 않을까요. 나는 매번 궁금하고 또 무섭습니다.



그러다 당신이 없는 겨울이 오면 이렇게 뜨여진 목도리를 한 철 내 두르고 다닐 겁니다.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성기게 뜨여져 여기 툭 걸리고, 저기 툭 걸리고 할 목도리가 발길을 자꾸 멈춰 세우겠지만요. 올이 툭툭 나가 온통 볼품없어져 기어이 당신이 모두 풀어헤쳐질 때까지 얼굴 가까운 곳에 매고 다니겠습니다. 그러니 나는 추운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 뜨개질이 한 뼘이라도 더 길어지기를 바라며 당신의 다음 말을 재촉할 뿐입니다.



이 모든 말들을 삼키며 매듭을 짓습니다. 다음에 또 뜨개질을 하러 올게요. 당신은 그때에도 지금처럼 차를 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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