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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Nov 20. 2020

가을이 부르는 노래

청풍호에서 만난 가을이야기


학교 특성상 두 달간 아들은 충주에서 지내야 한다. 가져갈 짐들이 많아 숙소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길을 나섰다. 창문을 조금 열자 쨍한 냉기가 여지없이 차 안으로 달려든다. 정신이 번쩍 든다. 서울 근교를 벗어나자 차는 막힘없이 달린다. 늦게 출발하면 차가 막힐 거라면 조바심을 치던 남편 얼굴에도 여유로움이 흐른다. 2시간 조금 넘게 걸려 충주에 도착한 우리는 아들이 지낼 숙소에 들러 짐을 정리해 주고 청풍호로 향했다. 예정에 없던 여행이었다.


호수를 끼고 달리는 도로 양옆에는 아직 떠나기 싫은 듯한 잎사귀들이 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가만히 햇살이 다가가 품어주지만 겨울은 빈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하나 둘 잎을 떨군다. 매년 만나고 헤어지는 가을이지만 느낌도, 낙엽 색깔도 분명 다르기에 가는 가을이 아쉬운지도 모르겠다.


"당신, 괜찮아. 한껏 들떠 조잘대던 사람이 조용해서." 하며 살며시 내 손을 잡는다. 나를 바라보는 남편 얼굴에도 아쉬운 가을이 잔잔히 흐른다.


몇 번의 들과 애잔한 가을 만나고 예쁜 카페의 유혹을 물리치며 우리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잠시 후 배는 우리를 태우고 서서히 청풍호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강을 감싸듯 양옆에는 가을과 겨울이 혼재한 산들이 호위병처럼 따른다. 배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풍경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렇게 한 15분쯤 달렸을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리 힘들어.....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 형....."


일제히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머문다. 같이 온 일행들이 그런다고 세상을 떠난 네 마누라가 살아 돌아오냐며 정신 차리라고 그를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세상이 허무한 듯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부르는 그의 노래는 배 안을 가득 채우다 물길 속으로 이내 사라진다. 그의 사연 때문일까 구슬프게 때로는 애처롭게 들리던 노랫소리는 선장의 몇 차례 제지로 끝이 났다.


                                                                         (청풍호)


그러나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뱃전에 기대앉은 그의 어깨 위로 다 쏟아 내지 못한 수많은 사연들이 쓸쓸히 내려앉아 있다. 이제 배 안은 물살이 뱃전을 스치는 소리와 사람들 이야기 소리만 들린다. 그런데 내게는 여전히 슬픈 듯 애절한 노랫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아까 그 남자가 애끓게 불렀던 노래는 더 더구나 아니다. 우리 바로 앞 자석에 앉아 있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노랫소리였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익숙한 저 노래, 어머니가 병상에서 부른 '허공'이었다.


어머니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20일 만에 깨어나셨다. 그런데 가족들은 알아본 듯했지만 말씀을 못하셨다. 담당 의사는 정상적인 과정으로 곧 회복할 것이라 말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에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하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리는 걸까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또다시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바로 어머니였다.

나미야도

상영이도 아닌 노래로 처음 말문을 여신 것이다. 깜짝 놀라 쳐다보는 나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노래를 계속 부르셨다. 회복 과정에서 부르는 노래였지만 어머니 노래는 슬프면서도 듣기 좋았다. 20년을 넘게 같이 살아오면서 거의 듣지 못한 어머니 노랫소리를 병상에서 들은 것이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허공에서 고향의 봄으로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는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같이 불렀다. 부르는 내내 서러웠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울고 웃으며 그 순간을 함께 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어머니는 경과가 좋아 예전 모습으로 회복하셨지만, 끝내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발이 간간이 내리는 날 우리와 이별을 했다.


청풍호 여행을 마치고 예약해 놓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 휴대폰에 녹음되어 있는 어머니 노랫소리를 들었다. 따라 부르다 남편도 나도 더 이상 부르지 못했다. 서러운 어느 가을날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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