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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May 27. 2021

음식이 가지고 있는 풍경

휴일 아침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딸아이가 사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어제저녁 딸아이는 이불에 커피를 쏟았는데 세탁기가 작아 들어가질 않는다며 전화로 볼멘소리를 했다. 당장 덮어야 할 이불이 없어 빨아야 하는데, 빨래방 갈 시간이 없다며 한 번만 엄마가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을 했다. 야멸차게 뿌리치지 못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남편은 눈 감고 귀 막고  모른척하라고 하지만 빡빡한 업무에 시달리며 허둥대는 딸을 보며 안쓰러워 그럴 수가 없었다. 



오피스텔로 향하는 거리에는 두 달이 지난 지금, 벚꽃이 하롱하롱 졌던 길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신록이 우거져 있다.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쁘게 산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사회인으로 혼자 생활한 지 이제 겨우 두 달, 아직은 힘든 흔적이 군데군데 보인다. 커피가 잔뜩 묻은 이불과 빨래를 챙겨 들고 근처에 있는 빨래방으로 향했다. 


"우리 꼭 취준생 같다."

"아이고야, 이렇게 늙은 취준생 봤어." 하며 남편이 웃었다.


빨래방에는 대형 세탁기 두 대와 소형 세탁기 한대 그리고 건조기가 두 대가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대형 세탁기 한 곳이 남아 그곳에 세탁물을 넣고 돌렸다. 세탁이 끝나자. 주섬주섬 빨래를 건조기에 넣던 남편은 팔자에도 없는 빨래방을 딸내미 덕분에 와 본다며 히죽 웃었다.

 빨래를 꺼내자 깨끗하게 마른 옷가지는 아직 열기가 남아 뽀송뽀송하고 따뜻하니 좋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냄새의 주인공은 바로 치킨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치킨 사 가지고 가자" 동시에 외쳤다.  딸아이 오피스텔에서 먹는 치킨 맛은 그곳의 묘한 분위기와 어울려 세상에서 둘도 없는 맛이었다. 음식이란 때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는가 보다.


제주도 여행 둘째 날, 그날 저녁에 먹은 음식도 그랬다. 남편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주도에 오면 꼭 가고 싶은 맛집이 있다며 인터넷으로 위치를 검색했다. 다행히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과 그리 멀지 않았다. 계획했던 관광이 늦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조금 늦은 저녁을 먹으러 아침에 검색해 놓은 맛집으로 향했다. 거의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맛집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한산했다. 뭔가 불안해 잘못 찾아왔나 싶어 위치를 다시 살펴보니 분명 그곳이 맞았다.


 아뿔싸, 가게 앞 유리창에는 " 준비한 재료가 떨어져 오늘 장사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쓴 메모가 붙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거기에 있는 몇몇 사람들도 우리처럼 왔다가 허탈해하며 서성이는 사람들이었다.


남편은 "에이, 좀 더  빨리 올걸." 하며 가게 안을 여러 번 들여다보며 아쉬워했다. 하는 수없이 우리는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가게는 밖에서 볼 때는 작아 보였는데  안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넓었다. 손님은 우리 말고 한 팀이 더 있었다.


문득 여행지에 놀러 가거나 시내에서 외식을 할 때는 무조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흑돼지 김치찌개'가 나왔다. 묵은 파김치가 곁들여진 찌개가 겉보기에는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한입 떠서 먹던 남편이 숟가락을 놓았다.


"왜, 맛이 없어?"

"아니, 뜨거워서,  고기 냄새도 안 나고 파김치가 알싸하니 맛있어. 당신도  먹어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찌개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날 우리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밥 한 공기를 더 추가해 먹었을 뿐만 아니라 김치찌개도 남김없이 싹싹 비웠다.  아쉬움으로 돌아섰던 맛집에 대한 생각은 잊은 채 우리는 여행의 즐거움과 함께 음식을 즐겼던 것이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하는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 유명한 세프가 나와 요리를 하면, 참가한 출연자들이 맛있게 먹으며 감탄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럴 때면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하며 언젠가는 저 세프가 만든 요리를 꼭 먹어 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요리는 유명한 세프가 만든 것이 아니어도  누구와  어떤 장소에서  어떤 마음으로 즐기냐에 따라 음식 맛은 그보다 훨씬 근사해질 수 있다.  그래서 음식은 맛으로도 먹지만 가끔은 멋진 풍경과 함께 즐기기도 하고 추억과 정으로 먹을 때가 종종 있다. 그 음식에는 그곳만의 풍경이 있고 추억 있고 내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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