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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Aug 25. 2021

12년 만에지킨 약속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동네 친구와 중랑천을 걷고 있는데, 딸한테서 카톡이 왔다. 늘 보낸 안부인사겠지 하고 클릭해 보니 "안녕하십니까, S호텔 콘티넨탈 레스토랑입니다. 예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예약 날짜가 적혀있다. 생각 히지도 않았던 내용이라  잘못 온 문자인가 싶어 다시 살펴봐도 분명히 내게 온 것이  맞았다.

재빨리 가족들의 생일이나 기념될 만한 일들을 떠올려 보지만,  남편 생일은 한 달이 넘게 남았고 내 생일도 아직 멀었다.  더군다나 이 호텔 레스토랑은 미쉐린 가이드에 들어간 적이 있는 곳으로 음식 맛이 섬세하고 맛있기로 유명하지만 가격이 비싸 나 같은 사람은 함부로 가기 힘든 곳이었다.


 그제 저녁에 통화했을 때도 아무 말이 없었는데. 무슨 일로 그 비싼 음식점을 예약을 했는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수많은 생각들이 회전목마처럼 다가왔다 멀어져 갔다. 이런 내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 기억 나. 12전에 내가 가족들한테 했던 약속 말이야.  이제는 그때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 같아"

어느새 나는 12년 전 봄날로 딜려가 고 있었다. 노란 개나리 꽃잎이 뚝뚝 지던날, 우리 가족은 외식을 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부천에서 서울로 가는 동안 아이들은 한껏 들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그때는 지금처럼 외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을뿐더러 아이들 가르치기에도 살림살이가 빠듯해 어쩌다 통닭을 시켜 주는 것이 유일한 외식이었다. 예정에 없던 이 외식도 남편이 부장으로 승진해 회사에서 S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는 식사권이 나와하게 된 것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먹는 음식은 정갈하기 이를 데 없었고 맛 또한 일품이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맛을 보며 즐거워했다.


"내가 이다음에  돈 많이 벌면 다시 한번 우리 가족이랑 이곳에 꼭 올 거야."

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퇴계로 어느쯤에서 중학생인 딸이 중대한 선언을 하듯 외쳤다. 그때 우리는 꼭 부탁한다며 한바탕 떠들썩하게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그런데 딸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12년 흐른 지금 우리는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나오는 음식은 음식마다 고유한 맛이 느껴지는 섬세함이 있었고 담백하고 풍미가 있었다.


 이제 성인 된 아이들도 음식이 나오자 느긋하게 즐겼으며,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도 같이 곁들였다. 처음으로 겪어본 서비스에 황홀해하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처음에는 딸이 힘들게 번 돈을 함부로 쓰게 할 수 없다며 반대했던 남편도 아이들과 와인잔을 연신 부딪히며 즐거워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서는데 딸이 가만히 다가와 팔짱을 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어느 날 느꼈던 풋풋한 향기 대신 달달한 와인 냄새와 함께 초여름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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