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카람의 연극 <더 휴먼스> - 에릭의 이야기
내가 지목한 첫 번째 관찰대상은 스티븐 카람의 연극 <더 휴먼스>의 주인공 에릭이다. 2016년 2월 18일 헬렌 헤이스 극장에서 초연을 올린 이 작품의 배경은 뉴욕, 추수감사절.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스크랜턴 시에 사는 블레이크 부부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 첫째 딸 에이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둘째 딸 브리짓과 남자 친구 리처드의 새 뉴욕 아파트에 방문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릭은 현재 나이 60세, 남편, 아버지, 그리고 아들. 세인트 폴 가톨릭 고등학교 시설관리로 28년째 근무 중이다. 그는 권위적이지 않다. 가족과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부분에 대해선, 관철될 가능성도 없는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댄다. 예를 들면,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으로 이사한 딸에게 왈,
에릭: … 난 너희가 건물이 두 개나 폭파된 홍수 위험지역에서 두 골목 밖에 안 떨어진 이 동네로 이사 온 게 끔찍하게 싫어.
이런 그가 이 마음에 안 드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불청객과 맞닥뜨린다.
쿵쿵 (위층 천장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
에릭: 되질, 대체 뭐야?
재밌는 건, 극이 진행되는 동안 여기 모인 여섯 명 중에 유독 에릭만 층간소음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위층에선 뭔가를 한다 치고, 에릭 당신은 대체 왜? 알고 보니, 며칠 동안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한 탓이란다. 꿈에 관심이 많은 리처드가 해몽을 해주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에릭은 꿈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대답을 회피해버린다.
극이 진행되며, 이 가족의 근심거리가 하나씩 밝혀진다. 에이미는 궤양성 대장염으로 인한 잦은 결근 탓에 탄탄하던 변호사 자리에서 쫓겨날 판이다. 취준생 브리짓은 학자금 대출을 갚을 엄두가 나지 않고, 에릭과 데어드레에게는 어머니 모모 앞으로 들어가는 병원비가 감당이 안 된다. 낡고 지저분한 데다, 저녁 내내 전구가 하나씩 나가 이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브리짓의 뉴욕 아파트도 영 못마땅하다. 이들에게 마흔이 되면 유산을 받기로 돼있는 리처드는 금수저로 비난하고 싶은 대상. 이 모든 근심거리는 이들에게 공포다.
브리짓: 엄마는 피가 나오는 거나 하드고어는 다 싫어해.
데어드레: 이미 끔찍한 게 세상에 차고 넘치는데… 아휴, 난 싫다 얘.
리처드: 어머니, 제가 어릴 때 좋아하던 <콰자>라는 만화책이 있는데요.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요. (중략) 등에 이빨이 달린 반 외계인, 반괴물이 나오는데요. 그들의 행성에선 무서운 얘기가 우리, 사람에 관한 거에요. 그 괴물한테는 우리 사람 이야기가 귀신얘기인 거죠.
산다는 건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공포와 매일매일 맞짱 뜨기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저 귀신을 처치할 방법을 궁리한다. <콰자> 속 괴물의 시선으로 보면, 사람들 세상이 보이지 않는 귀신 투성이, 고민 투성이, 공포 투성이 호러물이겠다. 에릭이 이런 호러 세상에서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고, 극 종반부로 향하며 그 공포의 정체가 드러나 가족을 충격에 빠뜨린다. (스포일러 없음. 그 정체가 궁금하시면, 메시지주세요.) 에릭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이 둘째 딸의 아파트에서 자신의 공포를 극복할 해답을 찾게 되고, 이야기가 끝난다.
<더 휴먼스>의 에릭을 통해, 나를 괴롭히고 있는 내 안의 공포의 정체를 생각해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악몽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죽을 때까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성질 못되고 몸은 이곳저곳 아픈 할머니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당장 글 쓴다고 커피를 너무 마셔 위장이 망가지면 어쩌나 하면서도 계속 커피를 끊지 못하고 있는 데서 오는 두려움. 마치 감사일기를 쓰려고 하는 순간 수도 없이 많은 감사할 것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갑자기 내 속에서 들이밀고 나오는 수많은 두려움의 얼굴에 흠칫 놀라 생각을 멈췄다. 공포의 실체보다 더 공포스러운.... 공포, 저 문을 열고 들어가 그 놈과 맞짱 뜰 용기! 내 행복을 위해 이제라도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