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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 Dec 13. 2021

기획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우리 회사는 꽤 오랜 업력을 가지고 있는 오프라인 기반의 유통 회사다. 흔히 말하는 대기업의 대열에 들어가고, 업무 방식이나 조직 문화는 수직적이고 보수적이다. 빠른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도 예외는 없고, 장애 처리보다 보고 없이 진행한 업무에 대한 질책이 더 많다. 이런 환경에서의 기획은 자율적이지 않다. 모든 업무가 워터폴 방식으로 쏟아지니까. 큰 프로젝트는 위에 있는 분 누군가의 한 마디에서 시작된다. 그 외 업무 개선 건이나 오류들도 온갖 채널에서 쏟아져 들어온다. 이미 진행하고 있는 업무가 분명히 있는데, 업무를 수행할 시간이나 물리적 여유가 되지 않는데도 위에서 시켜서 해야 한다는 일은 자꾸 내려 꽂힌다.


10명도 되지 않는 팀에서 온라인에 관련된 모든 IT 업무를 다 수행해내야 한다. 다른 조직들은 계속해서 덩치를 불려 나가는데 우리 팀은 몇 년째 TO가 그대로다. 수행해야 하는 연 단위 프로젝트의 수는 4배로 늘었는데, 프로젝트 담당은 여전히 혼자서 맡고 있다. 시스템 여기저기에 개선해야겠다 싶은 화면이나 기능도 있지만 자체적으로 기획 업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 당장 눈앞에 쌓인 업무량도 버겁고, 그걸 쳐내기에도 급급하니까. 우리 팀이 뻗어버리면 온라인 전산 업무는 돌아가는 게 없을 텐데,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협의를 통해 업무 순서를 정해야 할 텐데. 협의는 없고 우리 팀을 빼놓고 정해진 업무들이 그저 할당된다. 내용도 모르고, 공수도 파악되지 않은 채로 기한과 금액 범위만 정해져서.


요즘 기획자 구인 공고를 보면 어떤 서비스나 기능을 왜 기획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물어본다. 어떤 pain point를 중점으로 고민했고, 기획한 서비스가 어떤 채널의 어떤 사용자의 경험을 좀 더 낫게 만들었는지. 이해는 간다. 기획자는 디자이너나 개발자처럼 물리적으로 퍼포먼스를 증명할 수 없으니까.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 기여도를 판단하기도 애매한 일이다. 얘기를 나눠보면 알 수 있다지만 직무가 직무인지라 언변에 말리는 수도 있을 테니 채용하는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검증 프로세스다 싶다. 하지만 비IT회사의 비개발직군에게는 유독 가혹한 잣대가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최근 진행해 온 업무를 정리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고 필요로 해서 진행한 업무가 없으니까. 회사와 업무의 구조 자체가 스스로 생각해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나마 위에서 시켰어도 당위성이 있고 작은 범위 안에서라도 변주를 줄 수 있는 주제라면 다행인데 보통은 그렇지 않다. 연말에 아무 이유도 없이 뒤엎이고 있는 보도블록 같은 업무를 하고 있다. 디자이너나 개발자들에게는 그 업무를 왜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는데 기획자는 시작점이라서 유독 그런 걸까. 그들은 이런 요건이 있어 그다음 단계인 디자인과 개발을 이런 방향으로 했다고 주체적인 업무 설명을 할 수 있는데, 나는 도통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미 주어진 상황과 절대 바꿀 수 없는 틀 안에서 가장 나은 방향의 기획을 해왔지만 그게 기획자로서의 나를 증명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직군보다는 회사의 문제 같기도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와서. 어차피 나는 전혀 애자일하거나 수평적이지 않고, IT에 친화적이지도 않은 조직에서 워터폴 - 탑다운 방식으로 서비스 기획을 하고 있다. 전부 다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스타트업과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대기업의 간극을 줄이고 싶다. 어디로 가야 기획자로서 행복할 수 있을까. 절충지대쯤으로 IT회사를 막연히 떠올리고 있는데, 경험이 없으니 이게 맞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IT 조직이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조금 더 주도적인 업무를 할 수 있다면 기획자로서 이렇게까지 근본적인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주말 내내 했다.


연차가 애매하게 차오르니 커리어 패스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커머스를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 자체는 아직도 즐겁다. 다만 자꾸 근본적인 의문이 나를 괴롭힌다. 누군가가 던져주는 일을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작은 범위 안에서만 하는 내 일을 기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를 기획자라고 소개해도 되는 걸까? 자꾸 의문이 들고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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