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story
고양이와 함께 살다 이렇게 현실적인 고민과 문제를 마주할 때면 어떤 것이 옳은 결정인지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물론 '옳은 결정'의 기준은 M&A 입장에서 좋은 것으로 결정하려는 경향이 크지만 그들만이 아닌 그들과 나를 위한 결정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급식방법이나 집안의 구조를 그들에게 맞추던가, 주변이 훼손되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면 되지만 '수술'의 경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과연 이게 옳은 것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그 작은 몸에 칼을 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수술 후 그들의 감정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생각해야 했다. 알 수 없는 그들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고양이에게 중성화 수술이란 몽고의 경우 고환을 제거하는 것이고, 앙쥬의 경우는 자궁을 들어내는 것이다. 고환을 제거한다는 것도 끔찍했고, 자궁을 들어낸다는 것은 더더욱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애교를 바라보면서도 몽고는 함께 살게 되면서, 앙쥬는 입양 전부터 수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수술 여부를 내가 무슨 권한으로 결정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은 캄캄한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고, 상황별로 많은 생각을 해도 '고환 제거'와 '자궁 적출'이라는 현실은 쉽사리 결정을 내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죽을 때까지 발정 시기에 울고, 소변을 마음 내키는 곳이 뿌리는 스프레이 행위를 하고 말도 못 하는 스트레스를 감내할 몽고를 생각하며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몽고는 수술 시기가 늦었음에도 스프레이 행동이나 밤에 우는 일은 없었지만 고양이 중성화 적정시기인 생후 6~7개월을 생각하면 그리 빠른 대처는 아니었다. 여아에 비하면 간단한 수술이고 실밥도 따로 빼지 않는, 주사와 약을 제대로 챙겨주면 단기간 회복이 가능했고 몽고 역시 자연스러운 회복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수술 후 엘리자베스 컬러(수술부위를 핥지 못하게 막아주는 플라스틱 넥 컬러)를 쓴 그는 사료를 충분히 먹을 수 있음에도 먹여줘야 먹겠다는 눈빛만 보내기에 회복기 동안 사료를 떠 먹여드렸고, 화장실을 갈 때에도 리드미컬하게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춤추듯 걷는 그와 화장실까지 동행했다. 아마도 넥 컬러로 인해 걷는 공간에 대한 지각이 어려워서 그런 것 같다. 그는 수술 후 더욱 나를 의지했고, 아가처럼 보살핌을 해주고 나서야 원래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앙쥬를 만났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후였다.
앙쥬는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자궁 적출'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의 결론 없는 생각의 반복이었고 마침내 마음을 돌린 것은 수술 후 그녀의 상태변화에 대한 기대였다. 질병과 질환에서 예방되고, 무엇보다 집냥이의 수명을 20년이나 바라볼 수 있다고 하니 결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출산의 결과를 생각하니 시기가 늦지 않게 결정할 수 있었다.
고양이 여아의 경우 1년에 3번까지도 임신이 가능하다고 하며, 한 번에 4~6마리를 평균적으로 새끼를 낳는다. 평균 5마리로 1년의 세 번이면 15마리씩 늘어나는 것이다. 20년을 산다고 생각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새끼 냥이들을 다 키우지도 못할뿐더러 분양을 해야 하는데 해마다 몇 번씩 새끼를 떠나보내는 것을 그녀에게 감당하라고 하는 것이 잔인하게 생각되었다. 분양을 간 새끼들이 죽을 때까지 인간의 보호를 받으며 잘 산다는 보장 역시 없고,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게 될 체력적 요건과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발정기에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앙쥬는 수술 후 조금이라도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애교는 많지만 안기기를 싫어하고 만지는 것을 기분에 따라 허락하던 그녀는 엘리자베스 컬러를 쓴 채로 잠들었다 깨어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면 힘든 몸을 끌어 손 끝이라도 내 몸에 대고 다시 잠들었다. 그럴 때마다 잘한 결정인지를 생각하는 감정의 널뛰기를 경험해야 했고, 해 줄 수 있는 것은 회복에 좋은 음식을 먹이고 최대한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확실히 몽고보다 더 챙겨야 하고 회복이 늦었지만 안쓰러운 마음만큼 보다 더 잘 챙겨주며 회복을 도왔다.
약간 걱정스러운 것은 여아의 경우 수술 후 같은 사료, 같은 양을 먹여도 살이 찐다던데 '조금 쪄도 괜찮아'라는 생각에서 그녀의 통실통실한 배와 짧은 다리를 보면서 '괜찮을까?'라고 바뀌기는 했다.
인간은 사랑이나 로맨스라도 있는 시기지만 고양이에게 발정기는 공포감과 불안이 전부라고 한다. 그런 경험이 반복하여 오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지만 마음이 어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술 후 회복기 동안 그들을 보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인간이 편하기 위한 음모론에 의한 정보일 뿐이다라는 혼란스러움도 있었다. 나 역시 울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회복을 도왔지만 그 힘든 시기를 거쳐서 우리는 지금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중성화 수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