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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 우주 #αJR-62-EJSmOmN75keE-J54TGV88-DGDn43-6rPCF32c-5UUT96Zb-yt56Ω
이 우주는 196x 년 가을, 내가 태어난 지 며칠 안되어 갈라져 나왔다.
산모 S 씨의 모친 Y 씨는, 딱히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두 번째로 또 딸이라고 혼자 지레 눈치 보인다며 막무가내로 일찍 퇴원한다는 맏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수유실에서 아이를 안고 온 간호사에게서 아이의 팔찌를 확인하지 않고 받아 퇴원 수속을 하는 대로 K 병원을 나선다.
S 씨의 아이를 받은 산모 K 씨는 첫아이에 난산이었어서, 가족들은 그저 회복세인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서 역시 팔찌를 확인할 정신없이 아이를 가지고 온 옷으로 갈아입히며 팔찌는 그냥 폐기처분하고 퇴원한다.
그 결과,
나는 중산층의 맏딸로 3년 터울로 태어난 남동생과 모든 자원을 공평하게 배분받으며 자라고, 부모님과 달리 까무잡잡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여전하지만, 엄마의 쌍꺼풀과 아버지의 오뚝한 콧대로 누구도 닮지 않은 얼굴과 혼자 뻣뻣한 검은 머리카락을 덮으며 밝게 잘 자란다. 혈액형도 동생은 A형이지만 아버지가 A 엄마가 B여서 AB형을 설명했고, 아직 DNA감식 같은 것이 없을 때이기도 하지만, 자라면서 '쟤는 누구를 닮아서 저런 지'소리를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그리고, 여기의 나는, 내가 막내아들을 낳기 위해 위로 주르륵 딸 셋을 낳은 엄마가 둘째가 또 딸이라 실망해서 나를 낳고 울었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지도 않았지만, 또한 엄마가 물려주신 아버지가 나를 낳고 선물하셨다는 조그만 진주가 박힌 백금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우주에서 나에게는,
어려서 아버지가 북가좌동 국민주택 마당의 잔디를 깎으시면 비릿하게 올라오던 풀비린내와, 파라솔이 달린 하얀 철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아 폴카닷이 그려진 플라스틱 컵으로 주스를 마시던 기억도 없고,
국민학교 3학년 때 집이 이사 간 것을 깜빡하고 김유신 장군의 말처럼 무심코 가서 벨까지 눌렀던 집 앞, 제비가 머리에 닿을 듯 나는 골목에서 해 저물도록 남매 넷이서 뛰어놀던 기억도 없다.
대학 2학년 때까지 자란 집의, 현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에서 아무리 조심해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지점도 모르고, 여름에 해지고 나서 베란다에 나가 벽돌난간에 걸터앉으면 몸에 다사롭게 전해오던 온기가 어쩐지 다정해서 눈물이 나던 기억도 없다.
여기서 나는,
늘 실망만 안겨드린다는 부담감을 느꼈던 완벽주의자인 아버지도 없지만, 한국에 갈 때마다 이 다 늙은 딸이 놀러 나가면 매일 밤늦도록 안 주무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도 없고,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성미가 죽 끓듯 해서 비위 맞추기 힘든 엄마도 없지만, 그냥 전문대나 나와 돈이나 벌라며 재수를 반대하시던 아버지를 거역하고(?) 어느 날 성당에 다녀와 하느님이 재수를 시키랬다며(?) 상담교사로 벌어둔 쌈짓돈을 꺼내놓던 엄마도 없다. 엄마가 우리의 ‘규율’을 전담시켜 때로는 엄마보다 무섭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저 뒤만 따라가면 든든하던 우리 언니도 없고, 성격이 딴판이라 자라면서 토닥토닥 싸우기도 잘했지만 한국에 갈 때마다 자칭 '절대미각'의 솜씨로 집밥을 정성스레 차려주는 곰살맞은 여동생도, 자라면서는 늘 어딘지 영 시원찮던(?), 하지만 이제는 두 아들을 둔 가장으로 밤샘근무를 마치고도 한국으로부터 돌아올 때마다 공항으로 나를 태워다 주는 다정한 남동생도 없다.
이 우주에서 나는, 적절한 관심과 사교육을 받으며 괜찮은 대학 영문학과로 진학해 졸업 후 대학원을 다니다가, 친구에게 소개받은 어느 증권사에 다니는 세 살 많은 남자와 1년 반 연애하고 결혼해서 조금 늦게 들어선 딸 둘 중 하나는 대학 졸업을 미루고 있고, 둘째는 하필 지금 입시라서 코로나 때문에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다. 부모님의 도움을 조금 받은 전세 아파트에 살다가 주택청약을 해서 장만했고 최근에야 빚을 다 갚은 아파트가 최근에 정부의 망한 부동산 정책으로 많이 올랐지만 어차피 다른 집도 올랐으니 이사를 갈 수도 없어 별 의미는 없는 가운데, 나는 삼십 대 중반까지 신춘문예를 몇 번 응모하다가 낙방하고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끔 번역을 해서 번 돈을 만년필과 잉크덕질에 탕진한다.
나는 대체로 행복하고, 때때로 이상하게도(!) 가족들 아무도 닮지 않은 위 질환으로 혼자 고생하면서, 70대 중반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60대 초반에 자궁암 조기진단받고 수술해서 나은 병력이 있어 엄마와 같이 부인과 건강검진을 꼼꼼히 챙기며 살아간다.
사실 그 병력은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모르고
얼마 전 차를 타고 어딘가 다녀오던 길에 에코가 바로 앞차를 가리키며 저기 너네 엄마 간다! 고 말했다.
갑자기 그건 또 뭔 소리래, 하고 보니 앞 차의 번호판이 내 이름'S MOM으로 되어있는 거다.
문득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흔하디 흔한 막장 드라마 주제인, 키워준 엄마 낳아준 엄마 얘기나, 미국으로 입양을 간 사람이 한국의 부모를 찾아온 이야기라도 들리면 순전히 막내 동생 아드님을 위해 태어난 우리 자매들은, 지금 우리 엄마에게 불만인 것이 다소 있더라도 길러준 엄마가 진짜지 낳은 엄마가 무슨 상관이냐고 결론을 내리곤 했었다.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사실 우리 중 하나가 아니라, 하다 하다 안 돼서(?) 아들을 '주워다' 키웠을 경우의 수가 더 높은데도 우리 딸들이 주로 그런 생각에 마음이 멈추곤 했다는 사실은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 엄마같이 데면데면하고 살갑지도 않은 성격에 우리가 친딸이 아니면 키우지 않았을 사람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매달리고 싶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내 엄마가 맞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이 있어서 했던 자만(?)에서 오는 생각.
그런데, 그 번호판을 보는 순간, 저게 정말 나를 낳은 진짜 엄마라면 따라가 보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아니다. 그 순간 따라가 보고 싶었다.
목을 길게 뽑으면서 그 차가 우리 차와 갈라져 갈 때까지 바라보았다.
따라갈걸 그랬나, 그 후로도 며칠을 한 번씩 생각했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 땅에서 생모를 우연히 마주칠 확률은 어느 친구 따라간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서 돈 주고 산 방생한 물고기가 오십 년 후에 다시 내 낚싯줄에 걸려드는 일 보다도 더 말이 안 되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생각은 턱없이 돌고 돌았다. 에코 없이 그때 나 혼자였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날, 아마도 친엄마가 있다면 나도 찾아보겠구나로 순식간에 생각이 바뀌어버렸다.
현우주에서의 나는 막내아들 낳으려고 위로 내리 딸을 셋 낳은 집의 둘째다.
형제가 많으면,
맞이는 책임감이 무겁고,
막내는 뭘 해도 시원찮게 여겨지고,
아드님은 아드님대로 부담이 있는 등, 각 위치에서 힘든 점이 있겠지만,
둘째는 가운데 끼어서 그런지 뭐든 혼자서도 잘해야 하는 사람이다.
형제들 중 누구보다 제일 자주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도 좋은 소리도 못 듣는 사람.
언니는 맞이라 뭐든 중요하고,
여동생은 시원찮으니까 보살펴줘야 하고,
아드님은 하나뿐인 아드님이시니까,
보약을 다 지어 먹여도 '너는 제일 건강하니까' 빠지고,
생일파티로 친구들을 초대해 주는 것도 나만 '너는 안 해줘도 혼자서도 잘하고' (그래서 학교에서 친구들이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깜짝 생일 파티를 해줘서 나를 감동시킨 일도 더러 있었다)
혼자 약속을 취소'당'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다들 도망간 집에 남아 엄마 김장이며 고추장 담그는 걸 돕고,
결국은,
나는 이렇게 미국에 뚝 떨어져서도 '알아서 잘하고' 있나 보다 생각하곤 한다.
얼마 전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정말 여러 가지 뜻이 있고, 때로는 그냥 '그래그래 알았으니 이만 전화 끊자'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냉정하고 긴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다 : 나는 내가 무엇을 해도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누구에 대해서든 최대한의 애정이고, 그렇기에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래도 저래도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건 확실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위안이었다. 우리 엄마에 대한 우리 남매의 결론은, 엄마는 평생 엄마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여물지 못하고 그저 아내이고 한없이 사랑받던 딸로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엄마는 물론 나름의 방식으로(나의 대학 학위는 전적으로 우리 엄마의 덕분이다!!) 우리를 사랑하고 있겠지만 사랑하면 표현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평생 배우지 못했으면서도 늘 사랑받기는 바라며 살아온 사람. 그래서 종종 불만과 자격지심으로 본인과 주변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 당신은 살가운 말 한마디도 잘할 줄 모르면서 늘 당신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기를 바라는 사람. 그래서 딱한 사람.
나이 마흔 넘어가면 부모탓은 그만해야 한다고들 하듯이, 나도 까짓 나를 사랑해 주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까 엄마 사랑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되었는데도, 더구나 아들 낳으려다 생겨서 할 수 없이 키워진 사람으로서 나와 여동생이 사실 가장 아픈 것은,
엄마가 우리가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엄마는 우리의 사랑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다.
언제나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나를 내가 우리 아이 사랑하듯 키워 준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내가 그러하듯, 나의 사랑을 달갑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겨줄 사람이 엄마였으면 어땠을까.
결국은, 흥 그게 누구든, 나를 버렸으니까 우리 엄마가 나를 키웠겠지, 하고 픽 웃으며 접었지만 이날 내가 다시 저 평행우주를 떠 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것은 경우의 수에 불과해서, 얼마든지 그래프의 바깥 곡선을 따를 수 있고, 내가 어차피 모든 우주를 기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내 인생의 몇몇 중요한 시점에서 갈라져 나간 평행 우주를 한 번씩 들여다보는 것은, 따라서, '거창한 이정표를 찾자'는 것도 아니다.
나는 외려,
내가, 세상 모든 장소 중에서 하필 여기,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터럭 같은 많은 날들 중 하필 오늘, 느닷없는 폭설로 뒷문이 열리지 않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희귀 질환이라는 호산구성 위염과 위장 탈장의 진단을 받은 몸으로 이 글을 두드리고 있게 한, ‘얼핏 아주 하찮고 무의미한’ 요소들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 같다.
나는 21세기가 간절히 원했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고 우기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여기, 지금, 존재함,에 가장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다.
여기서 키워드는 존재함이다.
다음의 나의 평행 우주는 물속에서 갈라져 나갔고, 거기서 나의 존재는 끝이 났다.
*그림 : Mary Cassatt. Maternal Caress. 18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