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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 우주 #αKT-D34-23AJ877-4Ω
이 우주는 197x 년 여름에 갈라져 나왔다.
이 우주에서 나는, 물에 빠져 죽었다.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나를 언니가 미쳐 못 보았든, ( 당시는 언니도 아직 어린이인데 나만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조그만 실내풀장에서 담임이 자기 반 학생 빠진 줄도 모르는 안타까운 사건이 생기지 않는가), 혹은 구조에 협조를 하지 않은 사촌언니처럼 수영을 못한다는 이유로 언니도 구조를 포기했든, 아직은 식성 좋고, 책 읽기와 글짓기를 좋아하고, 체육은 즐겨도 어떤 것이든 누군가 이기고 지는 게임을 싫어하는, 건강한 어린이이던 나는 죽었다.
10년이나 키운 정이 있어서라도 부모님은 물론(이라고 믿고 싶다) 제법(!) 슬펐고, 아직 천지분간 못하는 막내를 제외하면 언니와 동생도 조금의 빈자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 바람에 생긴 여유 자원을 나눠먹으며 나머지 아이들 셋은 아주 조금일지라도 더 넉넉했을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들 넷이 돌아가며 필요한 철철이 옷이며, 나날이 크는 신발이며, 나 하나가 줄어들었으니 엄마도 조금 덜 힘들었을 것이다. 이 우주의 엄마는 계란 한 줄로 아버지와 우리 넷이 먹으면 두 번을 먹을 수 있어 드시지 않던 계란을 편하게 드실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는 '아이 크기'만 한 자원이 아니라 무조건 '사람' 하나 몫의 자원이 들어간다는 것을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알 테니까.
현 기준 우주 실제 사건 개요 :
우리 가족은 나 국민학교 4학년 때 큰집 가족들과 어느 강가로 물놀이를 간다.
이날 나는 노랑 파랑 줄무늬가 있는 흔하게 생긴 비치볼을 안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 혼자 놀고 있었고, 혼자라고는 하지만 당시 3천5백만 (2021년 현재 인구가 줄어들고 있어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다고는 해도 5천만을 훌쩍 넘어있다)을 자랑하는 대한의 인구밀도 감안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고, 방심을 했는지 나는 공이 살짝 돌면서 물에 빠질 뻔했고, 그 스릴이 재미있어서 한 번 더 돌아보다가 그만 실제로 공을 놓치고 가볍게 살짝 물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렇게 영화나 만화에서 사람이 물에 빠지면 어쩐지 그냥 가라앉지 않고 물 위로 ‘어푸어푸 들락날락’ 하는지 몸소 체험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본의 아니게 바로 그런 행동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나는, 큰집에서 언니오빠가 보던 고우영 만화에서 훔쳐본, 사람에게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된다는 얘기가 거짓이라는 것에 놀라며, 한편, 어차피 수영도 못하면서 이렇게 비건설적인 행동을 반복하느니 아예 물속으로 들어가 바닥으로 붙을 향해 걸어가 보면 어떨까,라는 아주 창의적인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어디가 뭍 방향인지를 파악하기는 여러 가지 걸림돌이 많은 상황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주변에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가 분명 들렸는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새싹이 이렇게 혼자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정말이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장난이 좀 (?) 심한 것으로 여긴 것일까, 아닌 접영이라도 격렬하게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던 중 어디선가 우리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ㅇㅇ이 물에 빠졌어!”
매우 놀랐다기보다는 뒤에 따라오던 애가 넘어진 것을 발견한 정도의 목소리였다. 언니는 나보다 고작 2살 위, 사촌언니는 그보다 다시 2살 위였고 따라서 중학생이었고, 제법 우리보다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곧 사촌언니가 도착을 하겠지, 하고 허우적거리면서도 설핏 마음을 놓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곧이어 조착한 따스한 구조의 손길은 뜻밖에 우리 언니의 튜브를 탄 팔이었다! (우리 언니도 수영을 못했다) 그리고 언니는 곧이어 나를 발이 닫는 곳으로 데려다 놓고는, 예의 그, 으이궁 하여간 속을 쌕이지, 하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유유히 튜브를 타고 사라졌던 것 같다. 나는 뻘쭘하게 우리 텐트로 돌아가 하루종일 언니가 이르지나 않는지 눈치를 보았을 것이고.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는 이날까지 정식으로 수영을 배운 적이 없는데, 이 사건으로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다기보다는 어려서 학교 풀장 다녀와서 중이염을 몇 번 앓아서 엄마가 물조심을 시켰기 때문인 것이 더 클 정도로 이 사건으로 내 인생에서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 중이염으로 고생을 한 것도, 자다가 베개가 흥건하게 젖도록 진물이 나와서 황당해서 부모님 침실에 가 “엄마 귀에서 국물이 나와”라고 보고를 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지 딱히 고통스러운 기억은 없다.)
나이 들어 인터뷰 결과 생명의 은인인 언니는 정작 이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나는 이 생명의 은인과 곧잘 토닥거렸고, 죽어가던 목숨을 건졌다고 해서 갑자기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이거나 한 기억도 없다,
이 우주 언저리 어딘가에는, 내가 아니라 남동생을 잃은 엄마의 평행 우주도 있다.
눈 깜빡할 새에 뽈뽈거리고 혼자 나가 돌아다니길 잘하던 어린 남동생이 기어이 집을 못 찾아 돌아와 졸지에 힘들게 얻은 아들을 잃어버린 우주.
남동생은 이날까지 사실 상당히 얌전하고 말 잘 듣는(?) 편인데도 어려서는 꽤나 촐랑거리고 나다녔던 모양으로 한 번은 엄마가 도저히 못 찾아서 실종신고(!)를 하고 있는데 마침 멀리 창밖으로 지나가는 것을 잡았다고도 하고 (나는 이 대목에서 꼭 잠자리채 같은 것으로 엄마가 녀석을 낚아채는 상상을 하게 된다), 한 번은 파출소에 데려다주신 '구루마 장수' 아저씨의 참외를 얻어먹고 팔자 좋게 팔베개를 하고 잠들어 있는 것을 찾아왔다고도 한다. (공짜로 참외를 벌어먹다니 운 좋은 녀석, 하고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엄마는 ‘하느님께 탁 믿고 맡긴다'며 무슨 배짱으로 애 넷을 대략 '놓아먹이'던 사람이지만 사실 엄마가 영세를 받은 것은 우리가 다 자란 후고, 혼자 아들 욕심에 모두 2년 터울의 졸망졸망한 아이 넷을 낳아놓고는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저 우리가 어서 자라 알아서 다 하기만을 바랬다는 훗날 엄마의 고백으로 미루어 사실은 그냥 글자 그대로 아이 네 마리를 키우는 것은 엄마에게는 벅찬 것이었던 걸로 보인다.
아무튼, 그래도 맏이라고 제법 모범의 대상이던 언니마저도 사실 순전히 그 녀석이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했던, 우리 딸 셋만 남아있는 우주는 상상하기도 고통스럽다. 우리는 자라면서 내내 나를 낳고는 울었고 여동생을 낳고는 도망치다시피 병원을 나왔으며, 막내 아드님을 낳고는 난산이었는데도 벙싯벙싯 웃으며 출산실을 나왔다는 얘기를 자랑처럼 들었으니 말이다.
얼마 전 에코가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가 쌍둥이를 낳고는 하나만 자기 새끼 취급을 하고 남은 하나는 젖을 안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괜한 감정이입을 해서 쓸쓸했던 기억이다. 어리석은 동물이라 치부하기엔 인간도 많이 다르지 않아서. 일껏 부모의 임종에 달려온 딸자식은 나 몰라라 아들만 찾는 부모 이야기도 부지기수고, 자식 중 하나가 무슨 이유로든 사라진 집의 얘기를 접할 때면 종종 특이한 점이, 없어진 아이를 끝없이 애도하는 부모 때문에 남은 자식이, '걔가 아니라 내가 없어졌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
부모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는가를 논하자고 하면 너무나 얘기가 삼천포로 가버리지만, 아무튼, 그렇게 엄마가 그렇게 겨우 얻은 아드님을 잃었다면 모를까, 아무튼 나는 내가 없는 우주에 남은 가족들들에 대해서는 딱히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다.
든 자리는 안 나도 난자리는 난다고 하니 내가 우리 가족을 너무 냉정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 자신의 인간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받고), 현 우주의 나는 이미 우리 가족에게 이미 20년 넘게 별로 표 안나는 빈자리라서 그렇게 생각되는 지도 모른다. 몇 년에 한 번이라도 본다지만, 막말로 ( 그대의 추모형태가 무엇이든 통틀어 말해 ) 제사도 일 년에 세 번 (추석, 설날, 제삿날)은 치르는 증조할아버지와 별반 다를 것도 없고, 가끔 여러 가지 매체로 모종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다지만, 어차피 점점 공통화제가 줄어드는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반쪽자리일 수밖에 없다. '만나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전화도 아니고 메신저로 용건만 전달하는 게 더 편해진 사람이 되었으니까. 누군가 아파도 무슨 일이 있어도 '뭘 거기까지 알려'의 대상이 되고, 내가 아프고 무슨 일이 있어서 연락을 못해도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여기고 잊고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곧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손 흔들고 떠나왔는데, 글자 그대로 '먹고살다 보니' 멀리 자리를 잡아버렸고, 나는 나 없이 가족들이 찍은 ‘화목한 가족사진'이 늘어날 때마다, 내 존재가 조금씩 투명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귀신이 된 느낌. 그것도 제삿날 왔더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무것도 차려놓지 않은 귀신.
엄마는 내가 가마가 뒤통수에 있다고, 이불 꿰매는 실을 길게 꿴다고 내가 멀리 시집을 가려는 모양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턱을 고이면 엄마 빨리 죽는다는 말도 하셨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턱을 자주 고인 나는 그러면 턱이 빠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팔순이 넘은 우리 엄마는 여기저기 고장이 좀 났어도 그럭저럭 건재하고 계시다. 우리의 조상들은 도대체 왜 지혜를 직설적으로 알려주지 않는가 ) 연필심을 길게 깎으면 멀리 산다는 말도 있다고 들었다.
모든 터부에는 숨은 이유가 있는지라 굳이 해석하자면, 실을 길게 꿰면 잘 엉키는데 자꾸 꿰어달라는 게 귀찮아서 그렇게 하는 것, 연필심을 길게 깎으면 잘 부러지는 데도 자주 깎아주기 싫어서 길게 깎아주는 것에 대한 경고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가마야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자라서 멀어지는 연습을 미리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엄마가 자주 하던 말 중에는 또한, 발바닥을 마주 대면 사이가 멀어진다는 말도 있었는데, 지나가는 말로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우리가 발 크기를 재어보자든가 해도 장난으로라도 절대 발바닥을 마주 대려 하지 않으니 "떠나는' 마음과 '보내는' 마음은 손바닥 부딛듯 만나야 소리가 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것은 또한, 나의 죄책감에서 나오는 말들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떠난 사람이다.
분명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글자 그대로 먹고살다 보니 멀리 자리를 잡아버렸다. 떠난 사람은 물론 떠나지 않은 사람과도 다르지만, 나는 이제 돌아가도 떠났던 그 사람과도 다른 사람이다. 함께 하지 못했던 잃어버린 시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아이 역시 미국에 사는 바람에 대학부터 집을 떠나 일 년에 겨우 두 번씩 만나고 산지 거의 10년이 되어가고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에는 1년 반 만에 한번 열흘 다녀갔기도 하지만, 서운해도 내가 내 살 길을 찾아 떠났듯이 아이의 떠남도 받아들이는 마음 바닥에는 내가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지은 죄를 돌려받는다는 마음.
그러나 내가 스스로 떠난 우주는 현 우주 말고도 적어도 또 하나가 있다.
다음에 들여다볼 우주는, 삼국유사 설화 '조신의 꿈'이랄까, 장자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이랄까, 이도저도 아니면 분홍신이랄까, 뭐라고나 할까.
그림: Children Playing at the Seashore - Edward Potth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