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밤의 꿈

-10

by 숨은 연못

평행 우주 #αKT-D34-23A-BK2T-D55-23AJ-S00nN75keE-J54TGV88-DGDn43-6rPCF32cΩ


재수를 시작하던 198*년 겨울이었다.


엄마가 큰댁에 갔다가 사촌 언니가 버린다는 낡은 핑크색 부츠 한 켤레를 겨울마다 발동상으로 고생하는 내 생각이 나서 집어 오셨다며 실으려냐고 내놓으셨다. 나는 안 그래도 아버지는 반대하시는 재수를 하느라 한참 기가 죽어있었던지라 멋으로라기보다는 발이 맞는 따뜻한 신이라서 그러마고 했는데, 헌 신이다 보니 굽이 닳아있어서 집 근처 구두수선소에 갔었다.
문이 열려 있는 구두수선 부스 안은 비어 있었지만, 안의 둥근 망이 오렌지색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작은 석유난로가 한구석에 여전히 켜져 있었다. 나는 문쪽의 낮고 둥근 자리가 달린 조그만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주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대학생 언니를 몇 번 따라다녀서 빈 가게에 들어와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잠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 마침 반가왔던 까닭이다.

한 십 분이 흘러 젊은 남자 하나가 서둘러 돌아왔다. 그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서둘러 팔에 검정 비닐 토시를 끼웠다. 그에게서는 흔한 다이얼 비누 냄새 같은 게 났고, 곁눈으로 슬쩍 보아 앞머리가 약간 젖어있었다.

곧 그는 능숙하게 굽을 뜯고, 새것을 대서 작디작은 못을 팡팡 두들겨 박아주었고, 굽 주변을 납작한 끌 같은 것으로 정리하고 폺폴이 일어난 낡은 가죽은 아교를 대서 다듬어 주더니, 이윽고 깨끗한 손가락에 감은 천 너머로 금세 더러워지는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공들여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그제야 금방 목욕탕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털어놓으며,

"그러니까 지금 제가 이 구두를 목욕재계를 하고 닦는 거네요, 그죠?" 하고 맑게 웃었다. 불쾌하게 추근거리는 것도 불평하는 어투도 아니고 그저 밝고 건강한 태도였다.

입시에 실패하는 것이 별 큰일이 아니랄 수도 있지만, 그전까지는 세상이 멸망해도 'Twilight Zone트와이라이트 존'의 한 에피소드에 나오는 노인처럼 나 혼자 살아남아 심심할까 봐 걱정하던 나였기에, 당시 나름대로는 생에 '첫 실패'를 경험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자각으로 겁에 질려있던지라, 나는 철없이 그가 부러웠던 것 같다.

뭔가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어엿한 '자기의 자리'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문득, 그 하고 매일매일 거기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손에 구두약을 묻히며 함께 살면 행복할 것 같았었다. 똑바로 보지 않아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이미 결혼해서 아기 아버지일지도, 심지어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는 남자와 몇 분 동안을 앉아 혼자서 평생을 어우르는 조신의 꿈을 꾸었던 기억.


이 우주의 나는 그 사람을 따라 집을 떠나 지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기준 현 우주의 남편과 만나지도 결혼하지도 않은 수많은 우주는 물론 존재하지만, 그리고 그 우주에서의 나는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이 우주만큼 '다른' 삶은 드물다.

그리고 에코가 없는 우주 중에서는 이 우주에서의 내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만 안다.




미국 일부 공항에는 아직도 군데군데 마사지 의자와 함께 구두 닦는 높은 의자가 더러 놓여있다. 대개 비어있어서 영업을 하지 않는 것도 같지만 호출을 하면 오는 모양이라 실제로 거기 앉아서 구두를 닦고 있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나는 주로 여행길인 공항에서 광을 내서 닦을만한 구두를 신은 적이 없어서 이용해 보지는 못했어도 구두 닦는 의자를 볼 때마다 그 사람 생각이 난다. 정확히 말하면, 금방 목욕한 손에 스스럼없이 구두약을 묻히며 날렵하게 천으로 구두를 타 다탁 문지르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그 손.

그리고, 몇 년 전 어느 날 한국 뉴스에서 교통사고 기사를 보았다. 기자는, 홀아버지로 오래 딸을 키운 그 남자는 사위 자리와 상견례를 마치고 돌아가던 행복한 날에 그만 변을 당했다고, 그리고 한평생 정직하게 구두수선을 해 와서 이웃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고 덧붙였었다.

나이는 얼추 맞지 싶지만, 그 남자는 분명 그 남자가 아닐 확률이 매우 높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몇 분 동안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을 떠올린 것은 당연하다.

이상하게 마음이 몹시 아팠던 것은 혹 평행우주의 공명이 아닐까.


다음 평행 우주 이야기에 이 분홍신이 다시 한번 등장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고.


그림:Ballet slippes -Deg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