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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Feb 01. 2021

아들 예찬론

아들이 갖고 싶었다


우리 아빠는 1남 4녀의 외아들이다. 엄마 또한 1남 4녀였는데 엄마는 그중 막내이자 늦둥이였다. 집 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을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면서 외며느리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 결혼했을 때 밥도 제대로 짓지 못할 만큼 살림을 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23살의 어린 나이에 외며느리로 시집와서 살림을 익히는데 무던히도 애를 쓰셨을 게다. 지금 엄마의 음식 솜씨는 사위들도 인정하는 요리 몇 가지를 갖고 계실 만큼 새댁의 어수룩함은 지워진 지 오래다.


외아들에게 시집 온 엄마는 딸만 내리 셋을 낳았다. 그나마 성격이 무던했던 할머니는 아들 타령은 하지 않으셨다지만 엄마의 속은 말이 아니었을 게다. 그 시절만 해도 며느리의 역할 중 하나가 대를 이음에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성별도 묻지 않았더랬다. 옆에 계시던 외할머니가 "아들이요, 딸이요?"라는 물음에 간호사의 "딸이에요."라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엄마는 당연히 내가 아들인 줄 알았다고 한다. 임신했을 때의 배 모양이며 뱃속에 있던 내 움직임이 위 언니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딸임을 알고서 엄마는 산후조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집에 오셨다. 그리고 아빠는 딸 셋의 충격으로 1년 동안 내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추억처럼 이야기하는 엄마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온 나는 나도 모르게 꼭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엄마의 팔자를 닮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될까 걱정이 되면서 딸만 있던 우리 집에 아들은 나의 로망이었다.


결혼도 하기 전 재미로 보는 점을 볼 때도 내 사주에 아들이 있는지 꼭 물었고 결혼 후에는 아들을 낳기 위해 온갖 낭설을 찾아 따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기좋게 딸만 둘을 낳았다. 엄마 팔자를 닮은 딸은 나뿐이었다. 독신주의자였던 언니는 보란 듯이 아들 셋을 낳아 엄마의 한을 풀었다. 요즘은 시대가 변하여 많은 사람들이 딸을 더 원한다지만 첫아이의 성별을 알았을 때 나는 서운함이 먼저 몰려왔다. 오히려 시댁에서는 괜찮다는데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4년 만에 둘째를 가지게 되자 나는 아들임을 확신했다. 아들이라는 여러 징후가 보이기도 했고 첫째조차 자신은 누나라고 하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싶었다. 아이들이 더 잘 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둘째의 성별을 알 수 있는 시기에 병원 가기 바로 전 날, 첫째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나는 언니 될 거야!"라고. 그 말이 어찌나 서운하고 불안하던지... 둘째는 첫째의 말대로 딸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 아이에게는 동성의 동생이 좋다고, 딸 둘은 금메달감이라는 위로의 말들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둘째가 아들인 줄 알았던 시절 나는 이제 내 할 도리는 다 했다며 왠지 모르게 어깨에 뽕이 들어갔다. 딱히 불편할 거 없던 시댁임에도 왜 그랬는지 할 말 다 하며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게 어지간히 꼴 보기 싫었나 보다. 나에겐 오랜 숙원인 아들은 보내주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도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보장만 있다면 셋째를 낳아볼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이내 알겠더라. 나는 아들을 키울만한 깜냥이 못되었다는 것을. 아들 같은 딸 둘을 키우며 만약 이 아이들이 정말 아들이었다면 나는 어땠을까?라는 생각만 해도 금세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만다.






얼마 전 완벽에 가까운 동서를 맞이한 나에게 사람들은 동서가 분명 아들도 순풍순풍 잘 낳을 거라며 걱정하듯 말했다. 우리보다 훨씬 빨리 집을 장만해서 그동안 돈도 제대로 모으지 못한 나를 스스로 질책하고 있을 때도 동서보다 먼저 아들을 낳아야 하지 않겠냐고 조언을 했더랬다. 그때 나도 모르게 했던 말이 있다. “나는 나로 인정받고 싶어.”라고. 아들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아들을 갖고 싶었던 것은 딸 셋을 낳은 엄마를 바라보며 또 1년 동안 내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나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욕구를 대신하는 방어와도 같았다. 내가 설사 아들만 다섯을 낳는다 해도 나의 자존감은 절대 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팔자에도 없는 아들을 키우느라 내 명만 짧아진다면 모를까.


나는 이제 아들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불순한 마음을 지니고 낳은 아들은 내게 자식 이상의 기대감을 갖게 할 것이다. 나를 인정받기 위해 아들을 이용할 것이고 아들을 잘 키우는 것만이 나의 사명 이리라 생각하며 집착 강한 엄마가 될 것이다. 그 아들 하나를 위해 나의 소중한 딸들을 희생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살면서 남편과 틀어지면 남편의 몫까지 아들에게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나로서 살고 싶고 나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는 중이다. 아들이 아니어도 괜찮다. 이 작은 그릇에 딸 둘을 선물해 주심에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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