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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형제 Dec 31. 2023

고등학생의 라면

유혹을 이겨낸 고통을 반항으로 되갚다

지훈은 눈을 깜빡이며 선생님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잡생각을 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을 다잡는다. 다시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4 공화국 유신 독재 시절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려주고 계신 한국사 선생님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잡생각이 떠오른다. 힐끔힐끔 대각선 앞쪽 자리에 앉은 학생의 어깨로 시선을 던진다. 서하는 지금 고개를 숙이고 프린트에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림을 그리고 있겠지. 이번엔 무슨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지난번에 그렸던 '네즈코*'는 정말 잘 그렸던데. 잡생각에서 다시 수업으로 정신이 돌아온 것은 선생님이 '수행평가'라는 단어를 얘기했을 때였다. 한국의 근현대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나 TV시리즈 등 미디어 콘텐츠를 소개하고 요약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은 PPT를 제출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네즈코 :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의 주인공 캐릭터 중 한 명으로 도깨비 소녀 설정이다. 


학교 수업을 들은 후에 복습하고, 방과 후엔 학원도 가고 학원 숙제를 해야 한다. 학습계획표에 따라 개인 공부도 해야 한다. 지필 시험 평가 방법 외에 수행평가라는 이름으로 과제가 주어지면 별도로 시간을 내어 준비하고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해왔던 패턴이지만 배우는 교과 과정의 난이도가 훌쩍 올라가기 때문에 시간과 에너지가 더 요구된다. 지훈은 중학교 때에는 상위권 성적을 올릴 수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상위권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중3 겨울방학이 되면 학원가에서는 예비 고1을 대상으로 한 방학 특강이 타이트한 스케줄로 개설된다. 단단히 각오를 다진 경쟁자들은 방학을 이용해 그런 트레이닝 코스에 돈과 시간을 투자했을 것이다. 반면 지훈은 고등학생이 된다는 것에 별다른 긴장감이 없었다. 지훈의 부모님도 방학 특강을 권했지만 지훈은 벌써부터 자신을 고등학생이라는 틀에 집어넣고 속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부모님 몰래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와 좀 더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금은 지나간 방학 동안 경쟁자들은 실력을 키운 탓에 지훈은 상대적으로 뒤처졌고 여자친구와는 헤어졌다. 결과적으로 둘 다 잃은 셈이다. 막간의 쉬는 시간엔 준서가 과학실에 놓고 온 물건이 있다며 같이 가 달라고 하기에 다녀왔다. 그러는 사이 서하에게 오늘은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물어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학은 그나마 지훈이 자신 있어하는 과목이다. 선행학습으로 이미 수학II*까지 떼었다는 이유도 있고 문제를 푸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수학을 잘하면 현행 입시제도 하에서는 여러 가지로 유리한 점이 많다. 그런 점 때문에 지훈은 아직까지는 막연한 자신감과 기대감이 좀 남아있는 편이었다.

*수학II : 공통 과목인 '수학'을 학습한 후, 더 높은 수준의 수학을 학습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이며, 사실상 필수 과목이다. 수학Ⅱ의 내용은 ʻ함수의 극한과 연속ʼ, ʻ미분ʼ, ʻ적분ʼ의 3개 핵심 개념 영역으로 구성된다.


지훈이 다니는 학교는 남녀 공학 고등학교이다. 심지어 여학생 남학생이 한 반에서 공부하는 남녀 합반으로 운영된다. 남자 중학교를 졸업한 지훈에게 교실에서 여학생과 함께 수업받는 것이 처음엔 적지 않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금세 어색함은 사라졌다. 다만 여학생들과 경쟁해야 하는 측면에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들을 만난 셈이다. 확실히 국어, 영어 등과 같은 어학 과목에서 강자들은 여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외의 과목들도 남학생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꼼꼼함으로 완성도 높은 과제물을 제출하는 것도 대부분 여학생들이었다. 지훈은 수시전형과 정시전형을 둘 다 준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 집중력이 분산되는 기분마저 든다. 거기에 더해 중학교 때는 생각하지 않았던 여학생들과의 경쟁은 또 다른 신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고 떠들썩한 급식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한 친구 녀석은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된 또래 여학생과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곁에 있던 남학생들이 사진을 보여달라며 모여들었다.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는 둥, 유명 인플루언서를 닮았다는 둥의 이야기가 오갔다. 지훈도 친구들의 오가는 이야기 속에 즐겁게 웃고 말을 던지기도 하며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한쪽 귀에는 에어팟을 끼고 있다. 이야기가 잠시라도 끊긴다 싶으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의 휴대폰으로 시선이 갔다. 그렇게 한동안 각자의 휴대폰에 시선을 두고 밥을 먹다가 다시금 짧은 이야기가 재개되는 것의 반복이다.


오후 수업 시간을 빨리 지나간다. 밥을 먹고 나서 밀려오는 식곤증에 멍한 상태로 있다 보면 어느새 수업이 끝났다. 친구 종윤이가 쉬는 시간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학교 끝나고 PC방도 가고 코인노래방에도 가자고 제안해 왔다. 같은 반 친구 윤서 생일인데 친한 애들 몇 명이 모여서 같이 놀자는 것이다. 지훈은 그러고 싶었지만 오늘 저녁은 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오늘 학원 가는 날이긴 한데, 엄마한테 친구 생일이라고 하루만 빼도 되는지 함 물어볼게."

지훈은 종윤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 생일이라면서 학원 하루만 빼달라고 하면 엄마가 들어줄까?'라고 혼자 생각했다.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핑계이기 때문에 엄마가 허락해 줄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그럴싸한 다른 핑곗거리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엄마한테 문자를 남겼다. 10분쯤 지나 안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집엔 아무도 없었다. 평소였다면 엄마가 집에서 지훈을 맞아주었을 터였다. 저녁밥도 차려주고 갈아입을 옷도 챙겨주었겠지만 오늘은 그런 엄마가 집에 없다. 오늘 아침에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일은 엄마가 모임이 있어서 너 학교 끝나고 왔을 때 집에 없을 거야. 그래도 저녁거리는 차려놓고 갈 테니까 국만 덥혀서 먹도록 해. 지난번처럼 라면 먹지 말고. 그리고 학원 갈 때는 어제 입었던 바지 입지 말고 다른 거 입고가."

건성으로 흘려들었던 말이었는데 막상 정말로 엄마가 집에 없으니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마주칠 때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건 하지 말아라', '어떻게 할 거냐', '다른 애들은 어떻다더라' 등의 이야기를 퍼붓는 엄마의 말들은 이제 이골이 났다. 지훈을 위하는 것이라는 명목으로 하는 잔소리들이지만 정말이지 너무나 듣기 싫었다. 친한 친구의 생일 하루 정도 놀고 싶었던 것을 억누르고 집으로 온 것이 왠지 모르게 손해 본 기분이 들었다. 


지훈은 가방을 아무 데나 던져 놓고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기 시작했다. 숏폼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금세 시간이 흘러간다. 집에 있을 때 지훈이 숏폼 동영상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엄마는 항상 뇌에 좋지 않다는 말을 ARS처럼 반복해서 하곤 했었다. 지금 그런 엄마는 외출 중이다. 그 사실이 지훈에게 해방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얼마나 숏폼을 보았을까 배가 고팠다. 거실로 나와 식탁을 보니 엄마가 차려놓은 음식이 밥상덮개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카레라이스와 소시지 반찬, 된장국이었다. 지훈은 밥상덮개를 다시 덮었다. 찬장을 열어 라면 봉지 세 개를 꺼냈다. 그리고 커다란 냄비에 물을 채웠다.

물이 채 끓기도 전에 라면봉지를 뜯어 면과 후레이크를 모두 털어 넣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라면 끓이는 법 따위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면이 익을 때까지 뜨거운 물에 끓이면 그만 아닌가. 냄비 뚜껑을 닫고 식탁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자 지훈은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휘저어가며 면을 적당히 풀어놓았다. 분말스프 세 봉지를 한 번에 겹친 채 한 손에 들고 탈탈 털었다. 분말스프 세 봉지를 한꺼번에 뜯어서 냄비에 털어 넣자 물이 거품과 함께 끓어올라 냄비 위로 넘쳐흘렀다. 그 바람에 가스불이 꺼졌고 가스레인지에 라면국물이 잔뜩 고였다. 다시 가스불을 켜려고 했으나 점화 플러그가 젖었는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냄비를 옆 화구로 옮기고 다시 가스불을 붙였다. 다시 끓자 계란 두 개를 집어넣고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라면이 완성되자 지훈은 가스 밸브를 잠그고 냄비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교회에서 나누어준 '청소년매일성경' 책자를 냄비 받침으로 썼다. 라면 냄비 옆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에 입장했다. 게임 시작을 대기하는 동안 라면을 큼지막한 젓가락 놀림으로 냄비 뚜껑에 덜어냈다. 한 손으로는 냄비 뚜껑을 받치고 한 손으로는 젓가락을 놀린다. '후우 후우'하고 불어 댄 다음 마치 키스를 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여 입안에 젓가락채 걸린 라면 면발들을 욱여넣는다. 탱글탱글한 면발이 입 안에서 허물어진다. 짜고 매콤한 국물이 입안을 적신다. 중독을 부르는 마성의 나트륨 맛이다. 이미 뇌는 '맛있다'를 연발하고 있다. 


게임을 하며 먹느라 라면은 점점 불었다. 상관없었다. 시계를 보았더니 학원 수업 시작 10분 전이었다. 학원을 안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판 게임이 끝나면 갈 생각이다. 단지 조금 늦더라도 어쩔 수 없을 뿐이다. 엄마가 집에 있었더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남겨진 라면 흔적이나 학원 수업에 늦는 일은 엄마가 알게 되어있다. 엄마가 알게 되면 잔소리를 할 것이다. 지훈에게는 이러나저러나 듣게 되는 잔소리인 것이다. 어차피 들을 잔소리라면 열 번 들으나 열한 번 들으나 차이는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열한 번 잔소리를 듣는 편이 득이다.  


지훈이 노트북을 노트북 껐을 때는 이미 학원 수업 시작된 지 5분이 지났을 시간이었다. 여전히 교복을 입은 채로 지훈은 학원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자신이 먹은 라면 냄비를 들고 방에서 나와 부엌 싱크대에 넣어 두고 신발을 신고 있을 때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아들! 너 지금 어디야? 학원에서 너 안 왔다고 연락 왔던데?"

 "응, 지금 가고 있어. 학교 갔다 와서 좀 피곤해서 잠깐 누워있다가 잠들었어."

 "그래? 알았어. 얼른 가. 엄마가 차려 놓은 거 저녁은 먹었어?"

 "응"

지훈은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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