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일상을 저녁 메뉴로 연결시킨 저의는 무엇인가
저의 두 번째 브런치북 '직업 그리고 저녁 식탁'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요새 즐겨 읽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 중에 몇몇은 책의 마지막에 작가의 해설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소설 속의 추리와 트릭에 대한 해설과 더불어 집필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느낌 심정을 담은 글이 책의 이해를 한층 높여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언젠가 저의 브런치북들이 책으로 출간될 것을 상상하며 브런치북 연재가 완성될 때마다 저의 소회를 담은 부록을 써보고자 하였습니다.
'직업 그리고 저녁 식탁'은 저의 첫 브런치북이었던 '이렇게까지 탐구할 일이냐고'를 마무리한 후 시도한 전혀 다른 스타일의 것이었습니다. 글 속 인물을 창조해 내고 그 인물에게 직업, 환경, 성격, 과거 경험을 부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첫 브런치북이 다분히 계량적이고 이성적이면서 유머를 추구한 것이었다면, 이번 시도는 서사적이며 감성적인 것을 추구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도 큰 도전이었고 쓰는 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특히, 단 한 치의 경험조차 없는 직업에 관해 쓸 때는 시간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경험해보지 않은 직업의 옷을 입어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많은 정보를 접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조사를 하고, 관련된 책을 읽고, 해당 직접을 가진 분에게 직접 질문하기도 하면서 가급적 많은 정보를 얻으려 하였습니다. 저에게 '글쓰기란 공부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으로 관념 잡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혼자 읽을 글이 아니라 적어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는 입장이라면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낼 자신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저의 평범한 일상이 독자분들에게 흥미를 주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허구의 인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직업 그리고 저녁 식탁'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기 다른 감정이 묘사됩니다. 첫 화 '회사원의 우동'은 유일하게 현재 저의 일상을 비슷하게 그려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하게 등장인물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글 속 회사원은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치이는 삶'을 삽니다. '치인다'는 것은 주도권을 남에게 빼앗긴 것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평온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2화 '은행원의 잡채'는 저의 전 직장 경험을 되짚어보며 쓴 것입니다. 덕분에 취재한다는 핑계로 아직도 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들 몇몇과 오랜만에 안부를 묻기도 하였습니다. 2화부터는 주인공에게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상정한 인물을 등장시켰는데, 저만 알아챌 수 있는 이스터에그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연결된 세계관 같은 느낌을 주게 하는 역할로 과거의 저를 등장시킨 것이지요. 2화에서는 택진의 은행 동기로 본사 마케팅부에서 근무하는 그 녀석이 바로 저입니다. 실제로 은행에 근무하던 시절에 마케팅부에 있었기 때문에 떠올려본 것입니다.
직업인으로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냄과 동시에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담아보려고 하였습니다. 3화 '교사의 짬뽕'에서는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교사라는 직업이 버거워지는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갈등'이 그려집니다. 사회적으로 교권침해에 대한 이슈가 뜨거웠던 시기였던 터라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았고, 교직에 몸담고 계신 브런치 작가님들이 댓글과 응원을 주시기도 했었습니다.
4화 '세일즈맨의 된장찌개'에서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현중은 남보다 앞서고 싶은 '조바심'을 느끼고, 5화 '변호사의 샌드위치'에서는 남들에게 선망의 직업인 변호사가 된 후 환상이 깨져 '실망'을 느끼는 미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에도 앞서가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치는 누군가가 있는가 하면, 막상 이루고 나니 별 거 아니더라며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누군가도 있지 않나요? 한편에는 2화의 은행원 택진처럼 '포기'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요.
'군인의 삼겹살'에서는 직업 군인의 옷을 입고 있지만 피 흘리는 사람을 목격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재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재환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해 연인까지 떠나보냅니다. 군대와 연관된 것이라면 역시 실연을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대한민국의 많은 군필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복무기간이 짧은 병사로 복무하면서도 심심치 않게 실연을 경험한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에 비해 복무기간은 길지만 비교적 외출이 자유로운 장교의 삶에도 피할 수 없는 실연의 그늘이 드리웠습니다. 결국 계급이 다르더라도 똑같은 사람이고, 실연당하면 가슴 아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경찰의 곰탕'의 베테랑 형사 규진은 성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집 근처 곰탕 집에서 저녁을 해결합니다. 불규칙한 생활과 고된 업무 때문에 '짜증'이 많은 간호사 정윤은 나이트 근무 출근길에 마라탕을 먹습니다('간호사의 마라탕'). 강력계 형사와 간호사는 일반적인 직장과 달리 출퇴근 시간이 들쭉날쭉합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정의를 지키고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시는 사회의 숨은 영웅들입니다. 형사 규진은 전날밤을 꼬박 새우며 범인을 체포하고도 다음날 저녁 느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향합니다. 간호사 정윤은 3교대 근무로 수면 패턴이 흐트러져있습니다. 전날도 나이트 근무를 하고 이른 아침 출근 인파를 뚫고 퇴근합니다. 이런 근무 패턴의 직업을 가진 분들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남들보다 배로 어렵다는 점을 한 번쯤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경찰 남편을 둔 아내, 간호사 여자 친구와 연애하는 남자는 포기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숨은 영웅의 역할 앞에 희생하고 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역에서 활약할 때를 '회상'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이야기인 '파일럿의 미역국'은 저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공군 파일럿이셨거든요. 지금은 전역하신 지 오래된지라 가끔씩은 아버지가 파일럿 출신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도 있을 정도이지만, 과연 정작 아버지 자신은 과거를 얼마자 자주 회상하실까 궁금했었습니다.
이어지는 '고등학생의 라면'은 저의 어릴 적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엄마의 떡볶이'는 제 아들이 태어났을 때의 육아경험을 되새기며 썼습니다. 고등학생 지훈은 놀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학교와 학원을 다닙니다. 그러는 건 순전히 엄마 때문입니다. 그러니 엄마가 자리를 비우자 지훈은 그때를 더 없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이 미덕이라 배우는 십대들이 불쌍하면서도 이런 귀여운 '반항'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엄마가 되면서 직장을 휴직한 소진은 15개월 어린 딸과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정신과 체력이 동시에 '고갈'되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한때는 꿈 많은 소녀였고 하고 싶은 것 많은 여자였지만 그 많은 것을 포기하고 딸에게 헌신합니다. 그런 삶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계속 참아오던 것들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납니다. 은퇴한 할아버지, 십 대 고등학생 아들, 그리고 육아맘. 이쯤에서 누군가 '이들도 직업인가?'라는 의문을 가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업이라는 경제적 관념보다는 역할이라는 의미로 보신다면 은퇴한 할아버지, 고등학생과 엄마도 여느 직업 못지않다고 동의하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보일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1화부터 11화까지 모든 연재를 관통하는 것은 저녁 식사 메뉴였습니다. 우동, 잡채, 짬뽕, 된장찌개, 샌드위치, 삼겹살, 곰탕, 마라탕, 미역국, 라면, 떡볶이. 전부 다 제가 좋아하는 메뉴들입니다만, 글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그 메뉴를 선택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고객을 만나러 먼 길을 찾아갔으나 바람맞은 보험설계사 현중이 왜 된장찌개를 선택했는지, 범인 잡느라 밤을 새운 강력계 형사 규진이 왜 곰탕을 주문했는지 말입니다. 저녁 식사 메뉴와 인물의 심리상태 사이에는 상호 개연성 따위는 없습니다. 단지 저녁 식사는 지친 하루를 채워주는 역할입니다. 따뜻한 음식은 상한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이렇게 막을 내리는 '직업 그리고 저녁 식탁'은 본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12화로 구성된 연재 브런치북입니다. 2023년 10월 29일에 첫 글을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총 2,054개의 하트와 총 132개의 댓글이 쓰였습니다. 난생처음으로 2분의 작가님이 유료 응원으로 힘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연재 브런치북이 아닌 매거진으로 발행했었는데, 뒤늦게서야 이미 발행한 글은 연재 브런치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은 내용의 글을 한 벌 더 연재 브런치북에서 재탕해서 발행하는 우여곡절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것 많은 제 글을 열린 마음으로 읽어주신 독자님들, 응원해 주신 많은 작가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도전적인 과제를 끝마치는 기분입니다. 시원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또 하나를 끝냈다는 충족감과 조금 더 세심한 노력을 기울일 걸 그랬다는 생각이 교차합니다. 혹시 모르죠. 아쉬운 마음에 같은 기획으로 2탄을 만들어 이번에 다루지 못한 다른 직업들을 다루어볼 수도 있겠죠. 다만, 다음 연재는 조금 재기 발랄한 것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글이든 음식이든 단맛 다음엔 짠맛, 그리고 다음엔 다시 단맛으로 이어지는 것이 다채로움이 있지 않을까요. 이른바 '단짠단짠' 말입니다.
저녁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커피를 한 잔 마셔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