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고 내려놓는 삶 속 채움
택진은 은행원이다.
오늘은 지점의 오픈 담당이라 일찍 출근한다. 영업시간은 9시 반부터이지만 은행원들은 적어도 30분 전에는 출근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출근해서 지점에 설정된 보안을 해제하고 다른 직원들보다 먼저 업무를 준비하는 것이다.
택진은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꼬박꼬박 아침밥을 챙겨주셨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아내를 조금이라도 더 자게 하고 싶어 안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침밥을 굶고 다닌다며 아쉬워하셨지만 택진은 별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 새벽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간에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걷는다. 근무하는 영업점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한다. 지하철 안에서는 휴대폰으로 미드를 본다. 외교관을 다룬 내용인데 요새 인기가 많다. 택진은 성격이 사교적인 편은 아니지만, 남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최근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이고 어떤 것이 요새 유행인지 촉을 세우고 정보를 입수하려 한다.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을 남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뒤쳐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를 보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느덧 은행에 근무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벌써 여러 번의 영업점을 옮겨 다녔다. 은행은 2~3년에 한 번 꼴로 영업점 직원들을 순환 발령을 낸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영업점이 네 번째 발령지이다. 서울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변두리 지점이다. 영업점 주변이 주로 주거지역 위주여서 방문하는 고객이 주부, 자영업자, 노인이 많다.
택진과 같이 근무하는 지점 직원은 총 10명이다. 위로는 지점장 1명, 부지점장 3명, 차장 2명이 있다. 택진은 조직의 허리라고 불리는 과장이지만 후배보다 선배가 더 많다. 은행은 이직률이 비교적 낮은 편이라 장기근속자가 많아 발생하는 현상이다.
영업점 건물에 도착해서 뒤쪽 직원 전용 출입구로 들어선다. 세콤 보안을 해제하고, 열쇠로 문을 연다. 출입문 손잡이에 달려 있는 요구르트 주머니를 뒤져 녹즙과 유산균 요구르트를 가지고 들어간다. 실내에 불을 켜고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들고 송풍 버튼을 누른다. 책상으로 와서 PC의 전원을 켜고 헬리코박터 유산균 음료를 마신다. 다 마신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PC가 부팅되는 동안 탕비실로 들어가 인스턴트커피를 한 잔 탄다. 택진의 책상은 대부계에 있다. 대부계는 대출업무를 주로 맡는 부서이다. 서랍을 열어 어제 처리하던 서류들을 책상 위에 꺼내 놓는다. 지하철에서부터 보던 넷플릭스 드라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출근을 한다. '안녕하세요'하고인사를 나눈다. 박부지점장이 금고문을 여는 소리가 난다. 넷플릭스를 보느라 깜빡했던 녹즙을 지점장에게 건네주러 방으로 들어간다. 평소대로면 가장 먼저 출근한 사람이 지점장 방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인데, 오늘 택진은 그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지점장이 간단한 조회를 소집한다. 직원들 각자 이번 달 실적에 대해서 언급하며 분발해 주길 당부한다.
시간이 되자 청원경찰이 지점 셔터를 올린다. 예전에는 셔터를 올리자마자 들어오는 손님들이 꽤 많았다. 이제는 은행 지점을 방문할 일이 점점 줄어서 오는 손님들도 적다. 그렇다고 일이 적은 건 아니다. 출납계 쪽에서는 계수기로 돈을 세는 소리가 들려온다. '딩동'하며 순번대기표를 리셋하는 소리도 들린다.
손님을 응대한다. 택진은 손님이 없을 때 대출서류를 처리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대출금리 인하를 요구하기 위해 방문했다. 손님의 주민번호로 신용등급을 조회하고, 소득이 인상되었거나 채무가 감소했는지를 묻는다. 5일 이하 단기 연체 기록이 조회된다. 남자에게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건넨다. 남자는 택진에게 언성을 높인다. 납득하기 어렵다며 나름의 주장을 펼치지만 택진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다. 손님이 은행으로부터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면 그 말을 전하는 직원이 화풀이 대상이 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직원의 입장에서는 무방비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요새 은행에서 직원이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시스템이 결정하기 때문에 직원이 하는 일은 시스템이 결정하는데 필요한 값을 입력하는 것에 불과하다. 언성을 높이는 남자 앞에서 택진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다른 은행도 거래하고 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그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걸 그랬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점심시간이다. 지점에서 근무하는 은행원은 점심시간을 여유 있게 즐기기 어렵다. 교대로 점심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1차는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2차는 12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로 나누어 교대로 식사를 한다. 하지만 명목적으로 나누어 놓은 시간대일 뿐, 보통 후배들이 1차로 식사를 가서 서둘러 밥을 먹고 자리로 복귀하면 2차로 선배들이 여유롭게 식사하는 게 실상이다. 그러다 보니, 12시 30분이 되기 전에도 눈치껏 자리에 복귀해야 한다. 택진은 1차 식사 순번이다. 오늘은 근처 즉석 떡볶이 집에 가게 되었다. 출납계 직원들도 합류해서 인원이 4명이 되었다. 여성 직원들이 합류하니 도란도란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넷플릭스로 보고 있는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본다.
아직 12시 반이 되기엔 15분 정도 남았지만 택진과 함께 1차로 식사를 하고 돌아온 직원들은 얼른 양치질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선배들이 식사를 하러 나간다. 사무실 밀집지역에 위치한 지점이 아니라 다행히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대출 상담을 받으러 오는 직장인은 드물다.
오후엔 주택담보대출 서류를 접수시켜야 한다. 지점 인근 아파트 단지 주민이 신청한 대출 건이다. 고객이 작성한 대출서류를 스캔하고 시스템에 필요한 정보값들을 입력한다. 원본 서류와 등기권리증은 행낭을 통해 모기지 센터로 발송한다. 요새는 정부의 가계부채 규제 때문에 조건이 까다로워지다 보니 은행원 입장에서도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많아졌다. 서류도 많아졌다.
인트라넷에 올라온 시행문을 열어보았다. 새로운 슬로건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시행문 기안자를 보니 아는 이름이다. 택진과 입행(은행에 입사하는 것을 말함) 동기이다. 그 녀석은 본사 마케팅부에서 근무한다. 신입행원 연수를 마친 모든 동기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지점으로 발령받았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본사에서 근무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행내 직무이동 기회가 있으면 본사의 사무직을 지원하는 녀석들이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본사로 전근을 가는 동기들이 늘어났다. 본사에서 근무하는 것은 무언가 중요하고 폼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던 것일까. 택진도 본사에서 근무하기 위해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끝내 택진에게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청원경찰이 지점의 셔터문을 내린다. 출납계의 계수기 소리가 요란하다. 스탬프 찍는 소리도 들린다. 시재(현금) 마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재함을 금고 안에 내려놓을 때 나는 금속음이 들린다.
지점 셔터가 내려가도 업무는 계속된다. 법정 의무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사이버 연수를 클릭해야 한다. 내일모레까지 완료해야 하는데 아직 몇 개의 회차가 남아 있다. 지겨운 클릭질을 한다. 클릭을 해놓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접수한 대출 서류들을 정리한다. 서류 보완이 필요한 고객에게 전화를 건다. 대부계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대출 말고도 펀드와 신용카드 실적을 올려야 한다. 이달 실적을 어떻게 맞출지 고민이다.
이윽고 선배들과 지점장이 퇴근한다. 택진도 퇴근할 준비를 한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본다. 지내다 보니 영업점 근무가 자신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간혹 힘들게 하는 손님도 있긴 하지만 손님을 응대하고 도움을 준다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 지점장이 실적으로 압박을 주긴 하지만 이제는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혼나면 그뿐이다.
현관문을 열고 택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TV 앞에 앉아 있던 아내가 주방으로 들어와 찌개에 불을 올리며 말한다.
"얼른 씻고 와. 잡채 해놨어."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아이를 갖고 싶은 택진이었지만 아내가 아이를 원치 않아 포기했다. 처음엔 서운했지만 지내고 보니 그런대로 아내와 둘만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식탁에 앉는 택진의 표정이 밝아진다. 택진은 아내가 차려주는 밥이 좋다.
젓가락으로 잡채를 한 줌 집어 올린다. 한 손으로 밥그릇을 받쳐 든 채 입 안에 잡채를 한가득 밀어 넣는다. 국수를 빨아들이듯 후루룩후루룩 빨아들인다. 입 안에서 피망과 당근, 버섯, 그리고 적절하게 간에 벤 당면이 참기름에 미끄러져 입안에서 꿀렁거린다. 코끝에 살짝 후추향이 감돈다. 아내만의 특별한 잡채 레시피엔 약간의 후추가 들어간다. 그 후추의 풍미가 왠지 잡채랑 잘 어울린다.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다시 한번 더 잡채를 크게 집어 입에 넣는다.
"맛있어?"
아내가 묻는다. 택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연신 입을 놀리고 있다.
많은 것을 포기했다. 아침밥도, 항의하는 손님을 향한 변명도, 실적에 대한 압박도, 본사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희망도,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도 포기하고 내려놓았다.
그래도 이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