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이는 하루 끝에 맛보는 자유
'I'm a cold heartbreaker. Fit to burn and I'll rip your heart in two~♪'
눈을 덮고 있던 안대를 벗고 손을 뻗쳐 알람을 끈다.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엑슬로즈의 목소리는 충분히 잠을 깨우고도 남는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주방으로 직행한다. 냉장고를 열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놓은 토마토와 피망, 케일을 믹서기에 넣고 갈아낸다. 도대체 맛을 알 수 없는 액체를 목구멍으로 억지로 넘기면서 소중한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다 비운 믹서기 컵을 싱크대에 내던진다.
휴대폰에는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TV 시리즈가 재생되고 있다. 그대로 휴대폰을 들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한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끝날 때쯤이면 약 20분이 흘렀을 것이다. 그 사이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다. 젊었을 때는 한 손에 드라이기를 들고 이리저리 머리를 손질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죄다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욕실을 나와 옷을 챙겨 입는다. 어제 입었던 청바지와 후드티를 집어 입는다.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고 현관문을 연다.
지하철역엔 사람들로 붐빈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열차에 오른다. 열차에 올라 자리를 잡으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펼친다.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인파가 쏟아져 들어와 밀쳐댄다. 하지만, 음악과 책은 그들로부터 철저하게 단절시켜 준다. 환승하기 위해 지하철 역 내에서 걸을 때조차 책을 손에서 뗄 수 없다.
"안녕하세요"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며 내 책상으로 걸어 들어온다. 탕비실에서 텀블러를 씻는다.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타서 자리로 돌아온다. 핸드크림을 바른다. 모니터를 켜고 버티컬 마우스에 손을 올린다. 자리에 앉은 채로 운동화를 비벼 벗고 슬리퍼에 발을 꽂는다. 사내 메신저와 그룹웨어에 접속한다.
어제까지 생성된 데이터들이 쌓여있다. 데이터들을 복사해서 내가 만들어 놓은 엑셀 파일의 시트에 붙여 넣는다. 자동으로 결과가 집계된다. 루틴한 작업은 가급적 손쉽고 빠르고 정확해야 한다. 몇 가지 엑셀의 함수를 사용해서 미리 산식이 적용되도록 해놓는 것은 일의 효율을 높여준다. 그럴수록 업무에 여유가 생긴다. 여유가 생길수록 고민하고 연구하는 일에 시간을 쓸 수 있다. 즉, 저급 업무를 처리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혀 고급 업무를 졸속으로 처리하는 일이 생길 리 없다.
그룹웨어에 올라온 조직개편 공지를 열어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툭하면 조직을 이리저리 떼었다 붙였다 하며 놀고들 있다. 축구팀이 성적이 나지 않는다고 자꾸만 선수들 포지션만 이리저리 바꿔댄다. 골키퍼에게 공격을 시키고 공격수에게 수비를 시키는 일이 이 회사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정작 교체해야 될 건 감독이다. '아군의 바보 대장 하나가 강력한 적군 백만보다 무섭다'. 자주 보는 전쟁사 유튜브 채널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내가 대장이 아닌 한 입 다물고 내 일이나 하는 것이 상책이다. 바보짓의 여파가 나에게 미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늘 엘리베이터는 사람들로 붐빈다. 엘리베이터가 8대나 있지만 24층이나 되는 고층빌딩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겨우 빌딩 밖에 나와서 향한 곳은 근처 순대국밥집이다. 팀 동료들과 종종 찾는 곳이다. 그럭저럭 맛이 나쁘지 않다. 식사를 마치면 회사에서 제공하는 모바일 식권을 사용하기 위해 발길을 옮긴다. 지정된 식당에서 사용해도 되지만 지정된 식당들이 몇 안되는 데다 맛도 별로 없어 직원들에겐 인기가 없다. 다행히 모바일 식권을 사용할 수 있는 카페가 한 곳 있어 다들 식사를 마치고 그곳에서 입가심으로 음료를 하나씩 집어든다. 요즘 들어 자몽에이드를 주로 마신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오른 것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몽에이드라면 대신 혈당이 높아지겠지. 자리에 돌아와 출근길에 읽던 추리소설을 다시 펼친다. 등장인물들의 일본 이름이 익숙치 않아 가끔씩 헷갈리기도 한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1년에 2~3권씩 쓸 수 있단 말인가.
'사기꾼 새끼들'
회의실에 마주 앉아 있는 광고 업체 관계자들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한다. 저것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검토해 보고 연락 주겠다는 말로 회의를 마무리지었다. 자리로 돌아와 사기꾼들이 건네준 제안서를 책상에 내팽개친다. 그 사기꾼 광고 업체 사장이 우리 회사 대표와 아는 사이라서 이번 제안을 들어보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나를 비롯한 직원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대표는 거래를 해보라고 말할 것이 보나 마나 뻔하다. 혈기 왕성했던 30대쯤이었다면 절대로 안될 일이라며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체념했다고나 할까. 직언도 상대를 봐가며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쯤이었다면 왕 앞에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는 것이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역모니 뭐니 하는 구실로 죽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만큼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이치에 맞는 것이라면 당연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사십 대가 되기까지 몇 번인가의 내상을 입고 나서야 왜 그렇게도 어리석게도 정면으로 맞섰는지 후회를 했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다. 점심때 벌어졌던 엘리베이터 붐빔이 재현된다. 다들 정시에 퇴근하느라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런들 어떠랴, 어쨌든 퇴근인데. 건물을 빠져나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다. 나는 지하철역을 지나쳐 도서관으로 향한다. 평일은 9시까지 문을 열기 때문에 퇴근 후 이용하기도 좋다. 요즘 같은 날씨엔 걷기도 좋다.
걸으며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밥먹 듯이 야근을 해야 했었다. 선배나 상사가 원하면 술자리에도 참석해야 했다. 집이란 잠자는 곳에 불과했다. 과연 그렇게 했어야만 했나 싶다. 물론 그때 그렇게 열심히 일한 덕에 실력도 많이 쌓이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렇게 워라밸이라는 합리적인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에 나는 아무런 기여를 한 것이 없다. MZ들이 우리 세대, 그리고 그 윗 세대들보다 현명하고 용기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도서관에 도착해서는 가방에서 꺼낸 책을 대출반납기에 올려놓는다. 자주 가는 2층의 일반자료실은 주로 문학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는 곳이다. '833.6이라...' 일본 문학 서적들이 비치된 통로에서 청구번호를 되뇌며 책을 찾는다. '기린의 날개'. 이번에도 히가시노 게이고다. 책을 빌려서 도서관을 나설 때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약간의 기대 같은 것이 생긴다. 어떤 내용일지 빨리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새 하늘이 어둑해져 있다.
지하철을 탄다. 출근시간보다 퇴근시간이 더 혼잡하다. 하지만 내가 도서관에 다녀오는 동안 마음이 급한 사람들은 이미 붐비는 열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비교적 한가해진 열차 안에서 나름 퍼스널 스페이스를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지없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펼친다.
매일이 치이는 삶이다.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에서 회사에서 치인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다. 삶은 언제나 여유롭고 즐거운 일들만 있어야 한다는 기대라도 한 것인가. 그런 게 아니라면 이 정도의 삶도 나쁘지 않다. 인간사의 모든 불행은 욕망과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돈을 많이 갖고 싶다는 욕망, 사랑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권력을 손에 쥐고 싶다는 욕망,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다는 욕망.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각박하게 만들고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도 안다. 나도 한때는 날이 선 예민함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욕망에 사로잡혀 허우적댔음을.
"어서 오세요."
지하철을 내려 역 근처의 우동집으로 들어선다. 키오스크 앞에 서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우동을 주문한다. 줄을 서서 먹는 맛집도 아니고, 실제로 맛이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곳이 편하다. 혼자 식사를 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실제로 혼자 식사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식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회사원의 하루는 뻔한 일들의 반복이다. 지루하다. 하지만, 그 안에 이렇듯 소소한 즐거움들이 있다.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 음악을 듣는 것, 그리고 혼자만의 식사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윽고 주문한 우동이 앞에 놓였다. 읽던 책을 덮어두고 젓가락을 집어든다. 고명이 국물에 잠기도록 젓가락으로 휘젓는다. 반대 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뜨끈한 국물을 목으로 넘긴다. 따뜻한 국물이 식도를 따라 흘러내린다. 체증이 함께 내려가는 것 같다. 젓가락을 들어 우동 면발을 들어 올린다. 후후 두 번 불고 입으로 집어넣는다. 짭조름한 간장 베이스 국물이 입안을 적신다. 통통한 면발이 식감을 자극한다. 면을 끊고 고개를 들며 면을 빨아들이며 들이쉬었던 숨을 내뱉는다.
다시 한번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먹는다.
하루가 그렇게 채워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