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된 실망 속에서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미경은 서울 소재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했다. 본사 구매팀에서 일했다.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사회생활과 다름을 많이 느꼈다. 그렇게 회사 다니면서 나이 들었을 때 자신 앞에 펼쳐질 삶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퇴사를 결심했다.
로스쿨에 입학하기로 마음먹고 LEET(Legal Education Eligibilty Test : 법학적성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10개월여의 사투 끝에 시험을 치렀다. 학부 성적(GPA)은 4점대였기 때문에 LEET 성적이 중요했다. 다행히 서울의 유명 여자대학교의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에 합격했다.
미경에게 로스쿨에서의 3년은 지옥 같았다. 법학 비전공자였기 때문에 공부해야 할 것이 기본적으로 많았다. 빡빡한 학사일정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수업과 실습이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공부의 산더미에 파묻혀 지내는 날의 연속이었다. 3학년이 되었을 땐 변호사자격시험 준비도 함께 해야 했다. 그렇게 법조인이 되는 관문은 높고도 좁았다. 하지만, 미경은 그 관문을 보란 듯이 통과했다.
로스쿨 선배가 대표 변호사로 있는 서초동의 한 법무법인에서 6개월 간 법률사무종사 연수를 했다. 연수가 끝나고 정식 채용되는 조건이었다. 법무법인의 소속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기대해도 괜찮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법무법인의 규모와 수준이 뒷받침이 된다는 전제에서만 그러하다. 미경이 변호사로 몸담은 첫 법무법인은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변호사 수도 5명뿐이다. 그러다 보니, 폼 나는 기업 소송이나 유명 연예인 사건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말이 법무법인이지 규모 상 법률사무소와 별 차이가 없다. 사건을 의뢰하려는 사람들은 법무법인이 왠지 더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로 느낀다는 이유에서 대표 변호사는 법무법인을 고집했다. 시시콜콜한 개인 사건들이 넘쳐났다. 미경은 실망했다.
미경은 바쁜 걸음으로 법원에 들어섰다. 10시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서였다. 사무실을 들르지 않고 바로 법원으로 출근하는 날이 간혹 있다. 309호 법정에 들어서서 참관석에 앉아 개정하길 기다렸다. 듬성듬성 사람들이 앉아있다. 미경이 참관석에서 소송 기록을 살펴보고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종종 법정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법정에 재판관이 들어왔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라는 법정경위의 목소리에 참관석의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3명의 재판관이 자리에 앉고 나서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2023나1414 원고 손윤정 피고 의료법인 참이쁜성형외과. 사건 관계자분 앞으로 나오세요."
드디어 미경의 사건이다. 피고석에 앉았다. 원고석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앉았다. 재판관의 진행에 따라 각자의 신분을 밝혔다.
"원고 손윤정 소송대리인 문태권 변호사입니다."
"피고 의료법인 참이쁜성형외과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HS의 손미경 변호사입니다."
성형수술을 받은 원고가 성형외과의 의료 과실을 주장하며 피해보상과 재수술 비용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재판관은 쟁점이 되는 사항에 대한 양측의 입장을 들어보고 '속행'을 선언했다. 다음 변론기일까지 양측의 증거와 서면 공방이 이어짐을 의미한다. 10분 만에 끝났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침 튀는 설전 따위는 없다. 변론기일이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땐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무감각하다.
11시에 형사 재판에 참석한 후 법원 청사 내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은 오후 4시에 재판이 하나 더 있다. 이렇게 중간에 시간이 뜰 때는 사무실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의 연속이다. 법무법인에서 수임한 모든 사건을 변호사가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다. 사건 내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변론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진다. 사무장과 법률사무원들이 소장이나 서면을 작성해서 제출하고 변호사는 변론에만 참석하는 식인 것이다. 낮 시간을 법원에서 쓰고 나면 변호사에게 서면을 쓰고 소송을 준비할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하다. 의뢰인의 고충을 해결해 주기 위해 변호사가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며 고민하는 모습은 과장된 묘사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다. 변호사들마다 각자의 집무실이 따로 있다. 선배들에게 찾아가 깍듯이 인사를 한다. 이 바닥에서 크기 위해서는 인적 네트워크가 생명이다. 미경은 자신의 방에 들어와 가방을 테이블에 던지고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대기업에서 일하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회사원이었다면 임원이 되지 않는 한 이런 독립 업무공간을 주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리 신입이라고 해도 변호사가 된 덕에 이런 방도 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은 것인가 미경은 생각해 본다. 방을 둘러보니 소송서류들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과 테이블 위에 쌓인 소송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실망 섞인 한숨이 나온다.
4시 재판은 부동산 전세금 반환 청구 소송이었다. 민사와 형사 사건을 가리지 않고 맡겨진다. 지금은 신입이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는 대표 변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역시나 이번 변론도 10분여 만에 끝났다. 변론종결하고 선고기일에 판결하겠다는 재판장의 말을 듣고 법정을 나왔다. 미경의 발걸음은 사무실로 향하다가 샌드위치 가게 앞에서 멈췄다.
"이탈리안 비엠티. 플랫 브래드 15센티로 주세요."
"치즈는 슈레드. 야채는 양파를 빼주시고 올리브 많이 주세요."
"마요네즈와 후추요."
이렇게 미경의 말에 따라 만들어진 샌드위치는 알록달록한 유산지에 돌돌 말려 포장되었다. 미경은 샌드위치를 가방에 넣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미경은 본격적으로 서면을 쓰기 위해 팔을 걷어 올렸다. 고무끈을 입에 물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모아 포니테일로 묶었다. 미경이 직접 수임한 사건이기 때문에 직접 서면을 쓰기로 한 것이다. 대여금 사건이다. 원고는 피고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피고는 원고가 준 돈은 투자금이었기 때문에 갚을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경의 의뢰인은 원고이다. 피고 측에서도 소송대리인으로 변호사를 선임했다. 입증자료 확보한 것으로만 보면 원고가 유리했다. 하지만, 이번에 피고 측에서 제출한 준비서면에는 방향을 틀어 상사채권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고 나왔다. 상인 간의 거래에서 발생한 채권은 5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미경은 상대가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의 논리를 반박해야 하는데 막막했다.
시간은 어느덧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직원들은 다들 퇴근한 시간이다. 허기가 몰려온 미경은 테이블에 던져두었던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일어난 김에 커피머신에 캡슐을 하나 끼워 넣었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미경은 휴대폰을 들어 블루투스 스피커와 페어링 시켰다. The who의 'Eminence Front'라는 곡이 흘러나온다.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샌드위치에 감긴 종이옷을 벗겨낸다. 햄과 살라미가 풍기는 외국스러운 향이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베어 물을 곳을 눈으로 미리 정확하게 조준하고 그리로 입을 벌려 돌진한다. 야채 씹히는 소리가 턱뼈를 타고 들려온다. 후추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씹을수록 입안에서 버무려지는 야채와 햄, 살라미, 마요네즈가 너무 맛있어 미경은 절로 눈을 감았다. 부지런히 입을 놀리며 샌드위치를 잡지 않은 한 손을 뻗어 머그컵을 집어 올렸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다시 한번 베어 물은 샌드위치. 이번엔 입 안에 올리브와 할라피뇨가 느껴진다. 둘 다 미경이 좋아하는 맛이다.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서 혼자 좋아하는 것을 먹고 있다는 것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했다.
미경은 크고 작은 실망을 했었다. 졸업 후 첫 직장은 실망스러웠다. 자신의 삶은 이것보다는 흥미롭고 찬란하길 바랐다. 전문직 직업을 가지면 좀 나을 것 같았다. 분명 나은 점도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큰 변화는 없다는 것에 미경은 다시 한번 실망했다. 재판이 돌아가는 모양도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배심원들을 앞에 두고 열변을 토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마주 보고 말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면을 주고받으며 글로 싸우는 것은 하나도 박진감이 없다.
미경은 샌드위치를 싸고 있던 포장용 유산지를 둥근 공처럼 손으로 구겼다. 휴지통을 향해 던졌다. 휴지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몸을 일으켜 떨어진 종이를 주우러 가고 싶진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모니터 안 준비서면을 들여다본다.
'재미없다고 실망만 하면 뭐 하겠어. 이 정도면 괜찮은 직업이잖아. 그걸로 만족하자.'
미경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키보드에서 탁탁 소리가 흘러나왔다. 플레이리스트에 수록된 Beatles의 Hey Jud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Remember to let her into your heart. Then you can start to make it better.
주드야. 너무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보자. 그녀를 너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그러면 더 좋아지기 시작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