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도 불판 위에 올라가기 두려웠겠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방이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바닥에 부딪쳐 흩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바닥 위에 만들어진 물의 흐름에 붉은 피가 섞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바닥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피 줄기를 보자 심장이 고동쳤다. 샤워기가 물을 뿜어내는 쪽을 향해 눈을 돌렸을 때 그곳엔 조일병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바닥에 늘어뜨린 손목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와 물과 함께 뒤섞이고 있었다.
몸서리를 치며 꿈에서 깬 재환은 머리맡의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4시 23분. 출근 준비를 위해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눈을 감고 뒤척일 뿐 다시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반복되는 이 꿈은 아마도 평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팔 굽혀 펴기를 했다. 몇 개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팔과 가슴이 뻐근해지고 땀이 났다.
조일병은 재환이 소대장으로 첫 부임했을 당시 소대원 중 한 명이었다. 늘 말 수가 적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편이었다. 선임 병사들이 조일병을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재환은 한때 걱정하기도 했지만 곧 안심했다. 그저 조일병은 잘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에겐 입대 전 교제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잘 웃지 않던 조일병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던 것은 사건이 있기 일주일 전즈음이었던 것 같다. 사건이 있던 날은 하필 재환이 당직사관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한 여름밤 당직사관실의 열린 창문으로 때아닌 물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소나기가 오는 줄 알고 밖을 내다보았던 재환은 건너편 생활관 건물 2층 샤워실 환풍구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누가 샤워를 한단 말인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재환은 생활관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손목을 긋고 쓰러져있는 조일병을 발견했다. 급히 의무대로 조일병을 옮겼지만 근처 대학병원까지 옮겨야 했다. 겨우 생명은 잃지 않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상태라 뇌에 손상을 가져왔다. 식물인간이 된 것이다. 조일병은 그렇게 군복무를 더 이상 할 수 없어 의병제대를 하였다. 그리고 두 달 전 병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출근 준비를 마친 재환은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재환이 근무하는 부대는 후방의 보병사단이다. 독신 장교들을 위해 마련된 숙소(BOQ : Bachelor Officer Quarter)는 부대 밖('영외'라고 한다)에 있어서 출근을 위해선 다시 부대 안('영내'라고 한다)으로 들어가야 한다. 부대 정문 위병소를 통과하며 초병을 향해 가벼운 손짓으로 경계를 받아준다. 운전석 창문 밖으로 힐끔 보니 위병소 근무 중인 병사의 계급도 일병이다. 또다시 밤새 꾼 꿈의 단편이 되살아난다.
재환은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육군에 입대했다. 임관 후 지금의 보병사단에 배치되었고 소대장 임무를 맡게 되었다. 병사들과 지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조일병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조일병 사건이 일어난 후 헌병대와 법무관실에서 여러 차례 재환과 소대원들을 조사했다. 조일병의 부모님을 마주하는 것이 재환은 두려웠다. 조일병의 어머니는 재환을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감싸며 등을 돌려 버렸다. 조일병의 평소 소대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조일병의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4년 전의 이야기이다. 이제는 더 이상 소대장이 아니다. 어느덧 재환의 어깨에는 대위 계급장이 달려있다. 장기복무 신청을 했다. 올해부터 연대본부의 작전장교로 근무하고 있다. 군단급 FTX 훈련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작전과장 박소령은 야심이 많고 눈치가 빠른 인물이다. 게다가 꼼꼼하기까지 해서 대부분 박소령의 지시에 따라 잘 보좌하기만 해도 기획 업무는 잘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재환은 상급부대와 예하부대와의 관계에서 소통과 조율을 하는데에 더 신경을 쓸 수 있다.
11시 30분. 오전 업무를 마치는 나팔소리가 방송되자 재환을 포함한 작전과 근무자들은 영내 식당으로 향했다. 몇 년 전 병영문화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간부식당을 폐쇄했기 때문에 모든 간부들(장교, 부사관)도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된장국과 야채튀김, 배추김치, 콩나물무침, 조미김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일과가 시작되는 1시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있다. 연대본부 건물 뒤편에서는 본부중대 병사들 몇 명이 족구를 하기 시작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재환은 이 시간을 이용해 윤정과 전화 통화를 하곤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는다.
재환이 장기복무를 신청한 것은 사회인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취업문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재환은 대학에서 원예학을 전공했다. 특정 분야가 아니면 일반기업에 취업하기는 쉽지 않은 전공이다. 문제는 재환이 그쪽 분야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재환에게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지 모르지만, 재환은 흘러가는 분위기대로 군 장기복무를 신청했다. 반면, 교제하던 여자 친구 윤정은 재환과 달리 무모하리만치 도전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재환보다 두 살 아래였던 윤정이 졸업 후 일반 기업에 취업하는 것 대신 전문 헤드헌터가 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재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헤드헌터는 고정급여가 거의 없고 오로지 성과급이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치열한 영업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직업 군인의 길을 택한 재환은 윤정에게 프러포즈했지만 윤정은 거절했다. 군인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재환도 윤정의 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근무지도 자주 옮겨야 하고, 군인 가족으로서의 관사 생활이나 위계 같은 것을 윤정이 버텨줄 것 같지 않았다.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다. FTX 훈련에서 대대별 병력 운용과 보급에 관한 사항을 다시 점검했다. 빼곡히 숫자가 가득한 엑셀 시트를 열어 병과별 병력 인원을 분석했다. 함께 훈련에 참여하는 기갑사단과의 합동 기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사전 교육훈련도 계획했다. 워게임(War Game) 시나리오상 적군이 상륙작전을 시도해 오는 상황을 상정하여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포병, 기갑, 항공 부대와 연합으로 대응해서 상륙 후 집결한 적군을 섬멸하는 작전이다. 다양한 병과가 참여하는 훈련이기 때문에 병력과 장비, 보급, 통신 등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았다. 바쁜 덕에 윤정 생각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오후 일과가 끝나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지만, 재환은 아직 사무실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직업군인의 길을 포기한다면 윤정은 프러포즈를 받아들여줄까. 그러려면 취업 관문을 뚫어야 한다. 두렵다. 하지만 그녀를 잃는 것도 두렵다. 프러포즈 거절 이후 어색해져 버린 둘 사이는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으르렁거리며 싸우진 않았지만 숨 막히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럴 때면 전화기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그녀는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말을 해왔다. 그런 얘기가 오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퇴근했냐?'
친구 준범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재환은 사무실을 나와 시내 번화가로 차를 몰았다. 40분을 가서 준범을 만나기로 한 고깃집 앞에 차를 세웠다. 전투복 차림의 손님이 가게로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라며 맞이하던 주인의 눈빛이 잠시 멈칫했다. "일행이 있어요"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재환은 준범을 쉽게 찾아냈다. 준범은 맞은편 자리에 앉는 재환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계속 고기를 구우며 말했다.
"왔냐?"
"응."
"얼른 앉아. 배고프다."
"너 연락받고 바로 온 거야."
"알았어. 누가 뭐랬냐?"
노릇노릇 익어가는 삼겹살을 보며 재환은 호출벨을 '딩동' 눌렀다.
"소주 한 병 주세요."
재환이 소주를 주문하자 그제야 준범은 고개를 들고 재환을 쳐다보았다.
"이 새끼. 군복이라도 좀 갈아입고 오지."
"뭐 어때."
소주 한 병과 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삼겹살이 익는 소리가 '치이익'하고 들려온다. 가게에서 틀어놓은 90년대 가요도 어렴풋이 들려온다. 재환은 소주를 들어 병뚜껑을 돌려 따고 두 개의 잔에 채웠다. 둘은 말없이 소주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치고 입으로 가져갔다. 재환은 고개를 뒤로 젖혀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그리고는 노릇노릇 익은 삼겹살을 집어 쌈장을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뜨거운 살점이 입안에서 식도록 입을 벌리고 바람을 내쉬느라 '허걱' 하는 소리나 났다. 씹을 때마다 육즙과 기름이 입안으로 터져 나왔다. 노릇하게 익은 부위는 바삭한 식감이 감돌았다. 씹는 것을 반복할수록 돼지고기의 향이 올라온다. 입안에 남아있던 소주의 쓴 맛이 이내 사라진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소주를 다시 한 잔씩 채운다.
"천천히 마셔."
재환의 여자 친구와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준범은 재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어. 알았어."
재환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오랜 친구 준범은 재환의 심정을 잘 안다는 듯 재환이 술잔을 또다시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서도 말리지 않는다.
재환은 난생처음 두 눈으로 보았던 피로 낭자한 그 광경을 본 후 같은 일이 또 벌어질까 내내 두려웠다. 소대장 보직을 벗어났을 때에 비로소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난 듯했다. 하지만, 매년 여름이 돌아오면 꿈속에서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잠들기가 두려웠다. 애매한 전공으로 사회에 진출했다간 실패의 쓴맛만 맛볼 것 같았다. 실패와 거절이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여자 친구에게도 거절을 당했다. 이제는 그녀를 잃을까 두렵다.
소주잔을 내려놓고 다시 삼겹살을 집어 입에 넣었다. 돼지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사람들이 자신의 살을 도려내 불판 위에 올려놓는 순간 두렵지 않았을까. 두려웠겠지. 왜 겁이 안 났겠어. 그런데 막상 이렇게 삼겹살이 되고 보니 별 것 아니지. 뭐든 시작하기 전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 막상 시작하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이 많다. 재환은 이런 생각을 하며 씩씩하게 고기를 씹어본다. 구수한 돼지고기의 향이 올라온다. 측은한 눈으로 재환을 바라보는 친구의 얼굴이 앞에 있다. 재환은 친구를 보며 씨익 웃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