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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형제 Dec 24. 2023

파일럿의 미역국

은퇴 후 회상에 젖은 일상이란

성철이 조종간을 잡은 전투기는 날렵하게 롤(Roll) 회전을 했다. 회전 후 즉시 쓰로틀(Throttle) 출력을 최대로 올리며 기수를 들어 올렸다. 전투기는 굉음과 진동을 울리며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땅이 온몸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숨을 쉴 수가 없다.

  "스톨(Stall)에 걸린 것 같다! 스핀(Spin) 추락 중!"

성철의 윙맨(Wingman)인 박대위의 목소리다. 성철은 고도를 올린 후 속도를 줄이며 기체를 기울여 배면상태를 만들었다. 지상 쪽으로 고개를 들어 박대위의 기체를 찾았다.

 "플랩(Flap) 내려! 플랩 내려!"

박대위를 향해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인지 박대위의 기체는 그대로 지상을 향해 회전 추락하고 있었다. 컨트롤 불능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젝트(Eject)!! 이젝트!!"

박대위에게 기체를 버리라고 외쳤다. 하지만 박대위의 낙하산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대로 박대위의 기체는 추락했다. 숲이 우거진 구릉에 폭발과 함께 붉은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성철은 오열했다.


*롤(Roll) 회전 : 수평비행 중인 항공기의 기수 방향을 유지한 채로 좌 또는 우로 날개와 기체를 회전시키는 기동

*쓰로틀(Throttle) : 항공기의 추진력을 조절하는 레버. 속도를 조절함.

*스톨(Stall) : 실속(失速)이라고도 하며, 항공기가 속도가 줄거나 양력을 얻을 수 있는 각도를 상실하는 경우 조종력을 상실하는 현상

*스핀(Spin) : 실속 현상의 하나로 항공기의 양 날개 중 한쪽 날개가 먼저 양력을 잃는 경우로 빙글빙글 나선형을 그리며 추락함

*윙맨(Wingman) : 공군 전투기 임무를 위해 선도기를 서포트하기 위해 동행하는 동료기로 요기라고도 함

*배면(Inverted) : 항공기를 거꾸로 뒤집어 조종사의 머리가 지면 쪽을 향하게 되는 상태

*플랩(Flap) : 항공기의 양 날개에 뒤쪽에 장착되어 있어 위 또는 아래로 움직여 양력을 조절하는 장치.

*이젝트(Eject) : 비상사출을 말함. 비상상황에 조종석이 공중으로 사출 되도록 하는 장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성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앉은 채로 스트레칭을 한다. 팔과 어깨, 허리와 무릎을 순서대로 움직여주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창문의 커튼을 젖히고 침대의 이불을 정리했다. 주방으로 나왔을 때 시간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해온 탓인지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어진 지금도 성철은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깬다.


성철은 올해로 63세이다. 공군에서 전역한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던 것을 시작으로 전역할 때까지 무려 38년이나 제복을 입고 살아왔다. 그 긴 세월이 흐르는 사이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했고 이제는 결혼도 했다. 성철은 얼마 전 할아버지가 되었다. 손주를 얻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제는 구닥다리 노인네가 되어간다는 서글픔도 있었다. 성철은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살아오면서 직업에 충실했다.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과 조종사라는 자부심에 고취된 채 젊은 시절을 보냈다. 성철이 조종 훈련을 받을 당시만 해도 조종사의 약 10 퍼센트가 비행 중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비행을 나갈 때마다 생사가 오가는 순간들을 겪어야 했다. 가정사에 대해서는 아내에게 맡겨 놓게 되었고 점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자녀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군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로 매년 전학을 다녀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훈련이 있거나 비상 대기근무를 할 때면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잦았다.


오늘은 주말이고 아내는 어제부터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간단히 혼자 아침을 먹고 나갈 채비를 했다. 집 근처 산책로를 걸을 생각이다. 나이가 들 수록 몸을 자꾸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산책로를 걸었다. 밤새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성철이 목격한 그날 박대위의 죽음은 잊히지 않았다. 이따금씩 꿈에 그 장면이 나오곤 했다. 그날 성철과 박대위가 탑승했던 항공기는 F-5A 기종이었다. 가볍고 경쾌한 선회 성능을 가졌으나 주익 날개의 크기가 작아 실속에 빠질 위험이 큰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위급 상황에서 조종사가 비상사출 장치를 사용하려면 일정 고도 이상이어야 한다는 제약조건이 있었다. 박대위가 마지막 순간에 기체를 버리고 탈출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추락하고 있었던 기체의 고도가 너무 낮아서 비상사출장치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성철을 비롯한 선후배, 동료 조종사들은 이런 점을 개선해 줄 것을 상부에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진 것은 없었다.


꽤 오래 걸었던 것 같다. 제법 피로감이 있었다. 성철은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와 물을 들이켰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지만 아직도 오전이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었다. 읽다가 잠이 들었다. 박대위의 영결식에서 유가족들의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성철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박대위의 아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아빠 없이 저 어린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성철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때는 서른을 넘기기 전에 결혼을 하던 추세라 얼추 결혼 적령기에 돌입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중매쟁이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구청의 사무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그녀는 큰 눈의 흰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조종사라는 직업이 선망을 얻을 시기였기에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그녀를 만났었다. 그럴 때마다 조신하게 입을 가리고 웃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결혼합시다."

대뜸 던져버린 성철의 말에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철을 쳐다보았다. 처음 만난 지 한 달 만에 단도직입적으로 청혼해 버린 성철의 성미에 그녀는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큰 딸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받아보니 손녀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

아직 말을 못 하는 손녀 대신 큰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녀는 입에 공갈젖꼭지를 물고도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꼬물꼬물 손가락으로 뭔가를 집었다 놨다 하며 화면을 쳐다본다.

 "우리 공주님, 안녕하세요."

 보기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그려진다. 결혼한 큰 딸은 아내가 여행을 간 동안에 부엌일에 서툰 성철이 혼자서 끼니를 잘 챙기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전화를 건 것이다. 걱정 말라는 얘기를 여러 번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손에 잡은 김에 메시지 확인을 했다.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는 동기생들이 다가오는 가을 산행 일정을 정하는 일로 이미 수십 개의 말풍선을 띄워놓은 터였다. 한참을 걸려 읽은 후 성철도 몇 마디를 보태는 메시지를 보냈다. TV를 켰다. 재작년에 막내아들놈이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이라며 100만 원을 쾌척했었다. 마침 성철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있던 때라 가족들과 상의 끝에 막내 놈의 100만 원을 합쳐서 TV를 새로 장만하기로 했던 것이다. 성철은 TV를 켤 때마다 그때의 막내아들놈의 기특한 행동이 떠오른다.


아내가 만들어 놓고 간 미역국을 데우기 위해 냄비에 불을 올렸다. 군에 현역으로 있을 시절에만 해도 부엌에 직접 드나들 일이 많지 않았다. 가스레인지를 켜거나 설거지를 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군에서 전역한 이후 집안에서 성철의 권위는 점차 낮아졌지만 성철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전기밥솥에서 잡곡밥을 밥그릇에 덜어 담고, 냉장고에서 김치와 밑반찬 몇 가지를 꺼내어 식탁에 올려놓는다. 미역국이 담긴 냄비가 끓는다. 가스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국자로 미역국을 국그릇에 옮겨 담았다.  

따뜻한 미역국 국물을 한 숟가락 떠 입으로 가져갔다. 담백한 소고기와 참기름향이 첫 마중을 나온다. 적당히 간이 된 국물과 미역의 식감이 입안에 맴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속을 달래주는 느낌이다. 한 숟가락 더 떠올려 입에 머금고 밥을 먹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생일날 끓여주시던 미역국이 생각난다. 젓가락을 들어 김치를 한 조각 들어 올린다. 미역국과 밥을 입에 머금고 놀리면서 김치를 합류시킨다. 김치의 차갑고 아삭한 식감이 청량감을 더한다. 김치의 짠 양념이 아우러져 오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성철은 한 손으로 밥그릇을 들고 밥을 국에 말았다. 뭉쳐있던 밥알이 미역국에 들어가 잘 풀어지도록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문대 주었다. 미역국을 촉촉하게 머금은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올려 입에 넣는다. 아내가 큰 아이를 출산 후 처가에서 산후조리를 할 때쯤 마주 앉아 먹었던 장모님 표 미역국이 생각난다.


성철은 요새 부쩍 옛날 일을 회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일에 몰두해서 하루를 바쁘게 살아왔던 나날들을 이제는 뒤로 하고 나니 이제는 여유로워진 일과 속에서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아진 것이다. 한때는 빨간 마후라를 두르고 라이방 선글라스를 쓴 멋진 사나이의 세계에 도취되기도 했었고, 진급을 거듭할수록 군 생활에 깊이 적응해 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이라는 핑계로 가정을 뒷전으로 미루기도 했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촘촘하게 지켜보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버렸다. 어느새 아이들이 훌쩍 커서 더 이상 아빠에게 놀아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띵한 느낌이었다. 잘 따르던 후배 박대위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날 비행에서 자신이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그렇게 성철은 과거를 곱씹으며 오늘도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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