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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형제 Dec 17. 2023

간호사의 마라탕

하루동안의 짜증을 날려버리는 마라맛이란

정윤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다. 곧 있으면 퇴근이다. 남들은 이 시간쯤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기도 하겠지. 병동에서는 아침잠이 없는 몇몇 환자와 보호자들의 기척이 들려온다. 뜬눈으로 밤새 스테이션을 지킨 정윤은 정신이 약간 먹먹하다. 의식체계가 좀 뻑뻑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시간이 조금 흐르자 교대 전 라운딩을 돌기 시작했다.


나이트 듀티일 때는 일이 분주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때때로 수술 후 환자들의 배액관 체크나 링거 교체를 하는 일은 기본으로 한다. 또는 EMR 시스템에 chart를 정리한다. 새벽을 눈뜬 채 보내면 배고픔이 찾아온다. 간단한 야식을 책상에 앉은 채 먹었다. 산부인과 병동엔 당연히 여성 환자들뿐이다. 예민한 환자들도 많다. 환자 보호자들 중엔 간혹 남편이나 아들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지난밤에는 한 남편 보호자 때문에 해프닝이 일어났었다. 다인 병실에서 코를 너무나 우렁차게 골아 주변의 모두를 힘들게 한 것이다. 참다못한 다른 환자가 새벽에 스테이션으로 와서 불편을 호소했다. 수술을 받은 환자의 남편이 병상 옆에 놓인 보조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정윤은 살살 몸을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보호자분. 코를 심하게 고셔서 다른 분들이 자는데 방해를 받고 있어요."

 "네. 미안합니다."

몸을 들썩이던 보호자는 옆으로 누워 자려는 듯 몸을 돌렸다. 정윤은 그 모습을 보며 병실을 나섰다. 스테이션으로 찾아왔던 환자도 링거 스탠드를 한 손으로 밀며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병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병실에서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정윤이 다녀간 후 그 남편은 다시 맹렬히 코를 골기 시작했고, 같은 병실의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 마디씩 하며 코골이범을 깨운 것이다. 그러자 코골이범은 "내가 코를 골고 싶어서 고는 것도 아닌데 대체 어쩌란 말이냐"며 "당신들이 못 자면 나도 못 자야 되는 거냐"라고 역성을 낸 것이다. 새벽 2시가 다 되어서 환자와 보호자 몇 명이 스테이션으로 와서 병실을 바꿔달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정윤은 골치가 아팠다. 정윤의 설득으로 코골이범은 휴게실 의자에서 눈을 붙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회복이 필요한 다른 환자들을 위한 조치였다.


환자들에게 조식이 배식되고 있을 때 정윤은 퇴근했다. 전철 안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꽉 차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피곤한 몸을 눕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정윤은 열차 문이 열리자 있는 힘껏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정차역마다 파도처럼 쓸려오고 쓸려나가는 인파와 힘겨운 몸싸움을 벌였다. 정윤 옆에 서있던 한 남자 승객이 휴대폰 들여다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뒤늦게서야 허겁지겁 내리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 남자는 정윤은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윤은 이미 열차를 내리고 있는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려 눈을 흘겼다. 그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제 갈길을 가는 듯 보였고, 열차 출입문은 닫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현관에서 정윤은 적막함과 함께 외로움이 몰려왔다. 가방을 던져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하고 발을 씻었다. 냉장고를 열어 샐러드를 꺼내어 맥주 한 캔과 함께 먹었다. 다 먹은 그릇은 싱크대에 던져두고 빈 맥주캔은 분리수거용 바구니를 향해 던졌다. '캥'하는 소리가 났다. 침실로 들어와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윤은 아직 그를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한 것 같다. '바보같이!' 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를 떠올린 스스로를 책망했다. '이제 그는 없어. 돌아오지 않는다고'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 그를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로맨틱한 운명적 만남 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이었는지 마지못해 나갔던 소개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큰 키에 얼굴이 하얗고 평범한 이목구비였다. 정윤의 마음을 끌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IT회사에 다니는 프로그래머라고 했다. 도무지 정윤과 공감대가 생길 것 같지 않은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일본 여행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을 금방 찾아냈고 한동안 일본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대화를 하면서 음식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둘 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첫 만남 이후 그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요청해 왔고, 몇 번인가 식사도 하고 술자리도 가졌다. 그렇게 점점 그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정윤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도 그는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고 청소하기도 했다. 퇴근하면 피로가 한 번에 밀려와 쓰러지듯 눕고 보는 정윤은 집안일은 미뤄두었다가 한 번에 몰아서 하는 편이었다. 점점 익숙해지자 퇴근하고 옷을 엉망으로 벗어던져 놓은 채로 그를 집으로 들인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는 규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윤이 이브닝이나 나이트 듀티 중일 땐 메시지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근무 분위기와 환자들, 보호자들에게 시달리는 스트레스는 어느덧 그를 향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흐트러진 정윤의 집안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이 거슬려 짜증을 냈다. 정윤이 데이 근무 중일 때 걸려온 그의 전화에 대고 짜증을 냈다. 정윤의 짜증을 말없이 받아주는 그가 한없이 미련스러워 보여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신경질적으로 그를 대했다.


"나는 언제까지 너의 짜증을 받아주기만 해야 할까?"

그가 말했다. 그날도 이유 모를 짜증으로 그를 몰아세우고 있던 정윤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정윤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며칠 후 정윤은 화장대 위에 놓인 그의 편지를 발견했다. 정윤의 고단함을 알기에 받아주려고 애썼다는 그의 사연이 적혀있었다. 읽어 내려가는 정윤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그도 사람이었기에 정윤이 던진 말의 상처가 그를 할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긴 상처가 쌓이고 쌓여 그도 많이 고통스러웠노라고 그는 편지 속에서 말했다.


알람 소리에 잠이 깬 정윤은 부스스한 눈과 찌뿌둥한 몸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적적함이 싫어 TV를 켰다. 오늘도 나이트 듀티다. 하지만 내일부터 삼일의 오프가 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아차하고 정신이 돌아와 출근 준비를 계속한다.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하는 길에 저녁식사를 해결하기로 한다.


지하철역 근처 마라탕 식당으로 들어섰다. 가방을 던져놓아 자리를 잡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보울과 집게를 집어 들고 재료를 담는다. 청경채, 숙주, 팽이버섯, 목이버섯을 담는다. 푸주, 건두부, 죽순, 그리고 연근을 담는다. 고수, 분모자, 옥수수면도 담아준다. 이렇게 가득해진 보울을 직원에게 건넨다. 받아 든 식당 직원이 보울을 저울에 올리며 포스 기를 누른다. 중국 억양이 섞인 말투로 질문한다.

 "마라탕이세요?"

 "네."

 "매운 단계는요?"

 "2단계요."

 "고기 추가하시나요?"

 "네, 양고기요."

익숙하게 카드를 리더기에 꼽고 계산을 하니 직원이 전표를 건네준다.

주문한 마라탕이 정윤 앞에 놓였다. 젓가락으로 재료를 이리저리 뒤섞어본다. 탕츠(숟가락)를 들어 국물 맛을 본다. 마라향이 입과 코를 자극한다. 알싸하고 찌릿한 느낌이 혀끝에 멤 돋다. 입안이 얼얼하고 맵다. 조금 더 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양념장 두 스푼을 더 넣고 탕을 휘저었다. 다시 국물을 한번 맛보니 이제 적당하다. 작은 그릇에 건더기들을 덜어 후후 불었다. 젓가락으로 건두부를 적당한 크기로 쪼개어 청경채와 함께 입에 집어넣는다. 흐물흐물해진 청경채는 아삭함은 사라졌지만 건두부가 씹힐 때마다 스펀지처럼 머금었던 국물을 뿜어냈다. 마라의 향, 알싸하고 얼얼한 느낌, 매운맛이 아우러져 묘한 쾌감을 느끼게 한다. 먹으면 먹을수록 코끝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정윤은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일하며 대하는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에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성가시게 하고,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더라도 단 한 번도 짜증을 낸 적은 없다. 하지만 정작 사랑하는 그에게는 일하며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모두 짜증으로 쏟아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를 떠나보냈다. 불공평하다고도 생각했고,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젠 이런 결과를 만든 자신에게마저 짜증이 올라왔다. 그는 매운 것을 못 먹었다. 하지만, 정윤이 원하는 마라탕을 그는 함께 먹어주기도 했다. 얼굴이 빨개져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입 먹고 물 한 컵을 비우는 그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런 생각하지 않으려고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맛있다. 맛있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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