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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의 말투

격식없는 시모 ㅣ 뒷담화 하는 글

by 며늘희

05. 시모의 말투



언어의 품격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행동과 몸가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말투와 억양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예측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대하는 예의와 마음 또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대단히 고풍스러운 집안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말을 내뱉을 때 해야 하는 책임감을 배우며 자랐다. 말하기 전에 정리하는 법과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나의 생각을 언어로 전달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많은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의 억양이나 말투 그리고 사용하는 단어에 적응하지 못하고 몹시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나의 시모도 큰소리를 내는 목청의 소유자이시며 내가 알지 못하는 사투리 단어를 종종 사용하신다. 무엇보다 대뜸 뜬금없는 맥락의 물음이나 대화의 흐름에 맞지 않는 갑작스럽고 완벽히 다른 주제의 질문은 나를 황당함에 빠지게 하는 요인 중에 하나이다. 누군가 경상도 시어머니를 맞이하였는데 전화를 걸어하시는 말씀의 첫마디가 "너 어데고?" 라고 하는 화법에 적응하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불만인 듯한 말투로 어디냐고 묻는 화법이 서울 여자에게는 이건 무엇인가,, 싶었을 터이고 진짜 어딘지 묻는 것이 아닌 경상도식 여보세요 ~ 의 시작과 같은 인사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시모는 전라도 출신인데(지역감정을 조장할 생각은 없다) 가끔 처음 듣는 사투리를 쓰거나, 언제나 화난듯한 말투에 나는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모의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과 그걸 표현하는 언어는 아마 평생을 함께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시어머니는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볼 때 좋은 것보다는 좋지 않은 것, 그리고 잘못되거나 나쁜 부분을 더 두드러지게 보시는 분이다. 엄마가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힘내라고 한다면 시모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엄마가 가끔 짜증스러울 만큼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고마워하는데 반해 시모는 모든 면이 부정적이신 것이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더라도 엄마는 감사해요. 이게 맛있어서 그러는데 조금 더 주실 수 있나요? 라며 일하는 사람의 수고에 고마워하며 웃으며 친절히 부탁하는 반면 시모는 차려주는 밑반찬을 보고 이게 다냐? 너 여기와 봤냐, 지금 요만큼이 다 나온 것이냐, 이게 끝이냐- 며 눈앞에 있는 반찬들을 못마땅해하며 젓가락으로 휘젓거리신다. 그리고 메인 음식을 들고 오는 직원에게 밑반찬이 이게 정말 모두 나온 것이냐며 내여 놓은 상차림을 손으로 가리키며 좋지 않은 내색과 함께 불만족스러움을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질문한다. 사장도 아닌 직원이 그러한 상황에 대처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다. 시모는 그런 직원에게 얼마짜리가 이런 식으로 밖에 안 나오냐- 어디 하나 먹을 게 없다고 핀잔을 준다. 시어머니가 이리저리 휘젓거이던 젓가락으로 음식을 맛본 뒤에는 짜다. 싱겁다. 부정적인 평가 또한 한나절 이어진다. 나는 맛있게 먹고 있는데 국이 뭐 이러냐고 핀잔을 줄 때면 갑자기 그 자리에서 나는 거지 같은 입맛의 소유자가 됨과 동시에 맛 따위에는 전혀 감흥이 없는 듯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이렇게 불평불만을 하는 경우는 우리부부가 시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고민하고 고심하여 알아보고 데려간 곳이거나 결제는 우리 쪽에서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모자란 식당의 음식인 것처럼 대하실 때면 모시고 대접하고 있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처음 이런 시모의 행동을 맞닥뜨렸을 때 나는 너무 당황스럽고 안절부절못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님 입맛에 정말 맞지 않는 거 같아 식당을 선정한 남편을 흘겨보기도 했고, 드시고 입맛에 맞지 않으시다면 조금만 먹고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도 제안해봤다. 그런데 그냥 매번 가는 식당마다 똑같은 행동을 하신다. 그렇게 내가 얼마를 내는데 이렇게 형편없이 내오냐- 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어머님이 내시는 것도 아니면서 돈돈 거리는 모습도 너무 맘에 들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처음 만나 식사하러갔던 그 식당에서는 뭐 이렇게 후질근한 식당이 다 있냐며 그곳의 인테리어를 직원에게 나무라기도 하였다. (예약은 시가쪽에서 했었으면서_) 물건 하나를 보더라도 예쁜 것을 먼저 보고 좋은 면을 보는 것이 아닌 늘 그렇지 않은 것에 모든 집중을 다하는 것과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쓸데도 없다는 식의 부정적인, 이게 뭐냐는 식의 말투에 나는 점점 질려갔다.




한 번은 해외를 어디 어디 가봤냐고 물으시길래 그동안 여행했던 나라들을 말씀드렸더니 갑자기 대뜸 자신의 아들도 비행기 몇 번 탔다며 남편을 툭 건드리며 그렇지 않냐고 물으셨다. 내가 해외에 가본 이력과 자신의 아들이 비행기 타 본 이력이 비교될까 자격지심이라도 있으신 걸까_ 나는 그렇게 많이 여행을 다닌 편은 아니라며 그냥 학교 다닐 때 기회가 되어 가기도 했고, 출장 겸 갔던 곳도 있고.. 라고 말씀드리니 자신의 잘난 아들도 출장으로 회사에서 돈 줘서 가봤다고 급하게 내 말을 자른다. 먼저 질문을 해놓고 갑자기 배틀이라도 하는 이 대화는 무엇인가.. 고민하던 차에 시모는 한 획을 그었다. " 그런데 며늘희야 너는 그런 곳을 왜 가니? 뭐 볼 게 있다고? 좋긴 하니? " 나는 이 부분에서 시모의 부정적인 스타일의 끝판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아! 어머님은 어딜 같이 가더라도, 그곳이 아무리 좋은 지상낙원일지언정_ 함께 여행하는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_ 왜 거기까지 갔는지_ 그 풍경이나 문화가 주는 소중함도 모르시겠구나. 시모는 그저 그때의 피로함이나 또 다른 불만을 늘어놓으실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속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는 일은 좋은 추억을 만드는 일이 결코 아님을_ 경험해보지 않았음에도 그 자리에서 시모의 불만족스러울 여행결과에 대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돌아갈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풍경. 새로운 경험. 그리고 색다른 문화. 기분전환을 기본으로 하고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는 것인데 " 뭐 볼 게 있다고 그런 곳을 가냐 " 라니_ 떠날 필요도 없는 거 같았다. 시부모님 두 분이서 가끔 드라이브 겸 여행을 떠나시면 도착해서 그야말로 볼 것도 하나 없어 산책하며 사진 몇 장 찍다가, 하루 자고 올까 생각했지만, 별로 좋지도 않은 곳에서 1박 할 필요도 없어 그냥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대다수다. 그 여행지에서 사진 속 시모의 표정 또한 웃고 있지 않다. 정말 그 찡그림 만큼이나 그곳이 별로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시모는 어디 가더라도 가는 내내 짜증이고, 가서도 별 흥도 안 나고, 돌아오면서는 피곤하고 화가 나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론가 출발하시는 이유는 그저 집에만 있어 심심한 것 또한 싫으시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에게 그저 함께 하니 좋고, 처음 가보니 좋다! 하시는 여행지가 과연 있을까?




그렇다고 결혼한 내가_ 부여된 직책이 며느리인 내가_ 아무리 싫더라도 부정적인 시모를 만나지 않을 순 없다. 빨간 날이 많이 껴있던 오월의 황금연휴 마지막 날 시가에 들려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다들 놀러 가던 그때 나와 남편은 지방으로 여행을 다녀왔었고 시부모님은 방콕을 하셨다고 했다. 연휴 내내 어디인지. 뭘 하는지. 궁금해하시면서 쉬는 날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다고 계속 연락하여 말씀하시던 시아버지께 곧 도착하니 좀 멀리 나가서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버님은 너희 피곤한데 어딜 또 가도 되겠냐고 배려의 말을 하시면서도 콧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마음에 서해바다라도 보며 맛있는 것을 먹자고 하셨다. 그렇게 네 명이 막힐 줄 뻔히 알면서도 기분을 낼 겸 연휴의 마지막 식사를 하러 떠나게 되었다.


이런 날 차가 막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다면 기분도 안나는터. 남들 다 길에서 시간 보낼 때 우리 또한 그리 하는 게 뭐 대수냐- 는 시아버지 말씀에 나는 이것도 추억이죠 ~ 라며 함께 웃고 있었다. 직면한 상황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고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불평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막히는 차들의 행렬 속에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시부모님의 말동무가 되어 드릴까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방문 요청은 하였지만, 그리고 같이 밥은 먹고 싶지만, 또 멀리 나가는 것도 좋지만, 매사에 부정적이신 시어머니는 아까부터 계속 투덜 투덜이시다. 아버님을 향해 소리도 질러대고, 길 막힌다며 네비를 똑바로 봐주고 있냐고 핀잔도 주고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당신 탓이라며 차막힘의 불만을 담은 좋지 않은 온갖 말을 쏟아붓고 있으시다. 나는 임신 중이었고 뒷좌석에 같이 앉은 시모의 부정적인 언변에 슬슬 짜증을 넘어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모는 거기에 욕설을 함께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듣기 싫어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려 했으나 목청이 좋으신 시모의 막돼먹은 언어가 안 들릴 턱이 없었다. 듣다 못한 남편은 뱃속의 아기가 다 듣고 있는데 '지랄' '염병' 이런 건 좀 아니지 않냐고 말한다. 너무나도 고마운 남편이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아차! 하고 눈치채면 좋으련만, 시모는 뭘 듣니 뱃속에 있는 애는 들을 수도 없다며_ 하나도 안 들린다고 무슨 소리를 하고 그러냐며 또 중얼중얼 그야말로 욕지거리를 하고 앉아계셨다. 남편이 "그래 맘대로 해- 근데 애가 태어나서 '지랄' '염병' 이란 단어 쓰면 할머니한테 배운 걸로 알고 있을게" 라고 말한다. 내속이 다 시원하던 차에 어머님은 느끼시는 게 전혀 없으신가 보다. "그게 뭐 어때서 그러니" 라고 하시며 자신의 언행이 잘못된 것도 모르시는 분을 앞에 모셔두고 바뀌지도 않을 행태에 대해 설명해봤자인 것을_ 이러한 시추에이션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내 아이의 말문이 텄을 때 시어머니의 짜증스러운 말투와 억양 그리고 욕설을 금세 배워버릴까 겁이 난다. 원래 아이들은 욕부터 따라 한다던데,, 아이의 눈에 크나 큰 어른인 할머니가 하는 말이 잘못됐다고 인식이 될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어른이 하는 말을 배워 따라 하고 심지어 매우 잘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이가 시어머니의 그 말투나 언행이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할 텐데(어른이 하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 가르칠 방도에 대해서도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알려준다고 한들 그럼 왜 할머니는 저렇게 말하냐고 눈을 크게 뜨고 따지고 들 것 같다.




시모가 막말과 욕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품격 있는 언변을 구사하지 않지만, 나에게 폭언을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초록 맘 카페나 빨강 판의 고민 글을 보면 말도 안 되는 폭언을 하는 시모나 생각 없이 막말을 하는 시어머니들도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여기서 내가 시모라는 그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_ 제발 시어머니라는 자리를 벼슬이라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자리는 없다. 당신이 일하는 곳에서, 혹은 만나는 사람이나 지인,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하던가? 상대방 입장이나 기분을 생각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은 오직 며느리에게만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길 바란다.




나의 시모의 문제는 부정적 생각과 불만 이외에도 대화의 기술이 없다는 데에 있다. 보통의 대화라 함은 누군가가 말을 하고 그 말이 끝난 뒤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대화하는 주제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연결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모와 이런 대화를 해본 적은 없는 거 같다. 우리 엄마도 했던 말을 한번 하고 다음에 만났을 때도 또 하고 그 이야기가 질릴 때까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모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자리에서 몇 차례 반복한다. 주제와 맞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누가 말을 하고 있든지 말든지 대뜸 끼어들어 원래 말하고 있는 사람과 오디오가 겹치는 일은 다반사이며 끼어들었던 대화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는 소위 말해 갑자기? 그 말이 뭔 말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본인 머릿속에서 하던 생각을 그냥 툭 내뱉고 말아 버리는 것이다. 시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도중에 시끄럽다며 본인 하고 싶은 말만 목청껏 이야기하시고 자신에게 집중하길 바라시기도 한다. 처음 이런 도떼기시장 같은 시월드의 대화의 장에 초대되었을 때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고 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내가 대답해야 하는 상황에 좌우로 끌려다니다 지쳐 돌아가실 뻔했다. 중간중간 남편은 한 사람씩 말해라. 갑자기 그건 무슨 이야기냐. 지금 누구한테 답을 하라고 하는 것이냐. 등의 중재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_ 모두가 예상하셨겠지만 이 모든 것은 소용없었다.


친정집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다과와 함께하는 대화의 시간이 나에게는 곤욕이었다. 가끔 술과 함께 오랜 시간 앉아있을 때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도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겠고 정신만 사나울 따름이다. 그런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잦은 방문을 요하니 내가 미칠 노릇 아니겠는가 ?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적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시아버지는 왜 지지 않고 시모가 그럴 때마다 자신도 오디오를 겹쳐가며 목에 핏대 세워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서로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처럼 본인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우리 부부가 있는 이 시간이 오직 말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일까_




부정적인 언변이든_ 알 수 없는 대화의 기술이든_ 이보다 내가 제일 힘든 것은 시모의 막말이다. 만약 막말을 넘어선 폭언을 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도 못 하겠다. 그동안 나에게 했던 상처되는 말을 나열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내가 쓰는 험담 글에 계속해서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남편은 엄마가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라며 결코 의도가 담긴 말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엄마가 꼬아서 말하거나 의미가 담긴 뼈 있는 말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럴 거면 속으로 생각하지 왜 말로 내뱉는가?


들을 사람이 있기에 말을 하는 것인데 굳이 그 말을 나를 향해 입 밖으로 내뱉으며 한다는 것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며 전달해야 하는 말인 것이다.


시모는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간 날부터 " 이제야 살만한데 이런 일이 생겨 너무 그렇다 - " 고 나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이 말이 뭔가 싶었는데 그 후로도 몇 번을 똑같은 말을 하셨고 심지어 상견례 날까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같은 말을 내뱉으셨다. 아들이 장가들면 좋겠다고 사귀는 내내 여자친구 소개해달라고 하셨고, 어서 결혼하라고 연애 3개월도 안되서도 보채시던 분들이 정작 결혼을 하겠노라 하고 찾아갔더니 살만한데 이런 일이 생겨서 그렇다니,, 여기서 언급된 '이런 일'이라는 것이 좋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내 기분 탓인가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을 어리둥절하며 쳐다보는 나에게 " 돈 나갈 일이지 않니 " 라고 하시며 쓸 돈도 없다고 하셨다. 이런 말을 들은 날은 내가 시모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어찌 나에게 이런 막말을 내뱉을까 싶었다. 그냥 걱정이 되어서 그런가 했는데 내 부모님 앞에서까지 같은 말을 내뱉으시는 모습에 이건 막말이 맞다고 생각되어 상견례 자리 내내 나는 기분이 상해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좋은 일에 치르는 돈이니 행복하다고까지 웃으며 말했지만 시모는 그게 아니라며 굳이 엄마가 해석한 좋은 의미를 잡아채며 중얼거리셨다. 엄마가 애써 좋게 돌려서 생각한 '이런 일'의 의미를 아니라고 하실 필요까지 있었을까. 누가 보면 네 집 아들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다.


말에도 인색하지만 돈에도 인색하신 시모는 자신은 시집와서 집을 받고 땅을 받고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너에게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차라리 받았다고 말을 말지_) 이런 말이 나를 배려한 말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저 막말로 느껴졌다. 뭐든 소리치며 이게 뭐냐고 부정적으로 말할 때마다 남편은 왜 그렇게 전투적으로 말하냐고 자신의 엄마를 다그쳐 봤지만 대답은 " 내가 쟤 시어머닌데 이런 말도 못 하냐 " 였다. 그리고 며느리인 내가 이미 자신을 파악했을 테니 눈치 볼 것 없이 할 말을 하겠다공식적인 선포도 하셨다.


이렇게까지 발언하셨으니 내가 당한 막말은 얼마나 많겠는가. 본인은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가슴에 사무치는 그러한 것들이 한이 되고 있다. 내가 이런 말을 듣고자_ 이런 대접을 받고자_ 결혼했던가 싶을 때도 있다.




시가에서 내가 당하는 언어폭력은 심히 무섭다.

남편은 시가에서 신혼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나에게 "오늘은 기분 나쁜 거 없었지?" 라고 묻는다. 결혼 준비하던 시절에는 너무 고생했어~ 라며 나를 토닥이던 사람이 이제는 얼마나 힘들었을지에 대한 걱정은 제쳐두고 아무 일도 없지 않았느냐고 확인받고자 한다. 나는 그런 남편을 옆에 두고 이를 빠득빠득 힘주어 갈게 된다. 왜 남편은 함께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서 내가 기분 나빴던 부분을 인지 하지 못할까. 오늘은 기분 나쁜 거 없었지? 라니.. 오늘도 변함없이 너의 엄마는 내게 막말을 던졌는데 말이다.


너와 내가 함께 같은 공간 안에서 시어머니가 내뱉은 말에 내가 상처되고 평생의 한의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함께 마주해놓고 어떻게 저렇게 모를까. 입장이 달라서 그러한가_ 그만큼 시가의 언어폭력은 나에게 무서운 것이다. 그렇게 가해지는 폭력을 나는 앞으로 얼마나 오래 참아내야 할까. 끝은 있는 것일까_


시가의 격 없는 행동들을 깨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대놓고 달려들어 시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정도로 막돼먹지 못했다. 단지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_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지_ 하며 또 한 번 교훈을 얻는다. 이제는 시어머니가 조금 언성을 낮추시고 막말을 피하시려 조금의 노력을 하시는 듯 보이지만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한 원금은 갚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와 나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 시모가 나에게 내미는 손이 아무리 가까워지려 해도 이전에 나에게 쌓인 미움과 상처에 대한 이자가 더 빨리 복리로 크게 불어나고 있다. 언젠가는 그 벌어지는 격차가 터무니없이 멀어져 단지 남편의 부모님이라는 이유로 자식 된 도리로서 그 관계를 끊지 않게_ 즉, 파산하지 않게 유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인슈타인 말이 옳았다. 복리야 말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자 불가사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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