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식없는 시모ㅣ뒷담화 하는 글
결혼을 준비하면서 많은 이들이 양가 집안의 태도를 비교 아닌 비교를 하게 된다. 나는 우리 집에 대단히도 살갑도록 아빠 엄마를 모시지도 않았기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해드린 것이 없어 바라는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경성에서 날아온 것인지 혹은 조선시대 중턱쯤 살고 있는 것인지_ 그 옛날 사람처럼 전통과 이치를 따지시는 분이셨던 것이다. 나는 몰랐던 우리 엄마의 가치와 이념.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치르면서 나는 엄마가 개화기 그 어딧쯤에서 건너오신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혼 준비는 시작했지만 나는 스튜디오 드레스 그리고 메이크업이라 불리는 일명 '스드메'에만 관심이 있었고 엄마는 격식과 예의, 전통에 관심이 있었다. "원래 이건 하는 거야." 뺄 건 빼고 간소화하기로 했던 결혼 준비가 엄마 덕분에 뭘 - 그 렇 게 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엄마는 내가 시집가서 책잡힐까 봐 전정긍긍이신듯 보였다. 그래도 어떻게 시아버지 옷 한 벌 안 해드리고 시집을 가니, 적어도 시부모님 이불을 해 드려야 한다, 아무리 달라졌더라도 일가 친척분들께 인사도 꼭 드리고 결혼식에 옷 한 벌 해서 입고 오시라는 명목의 돈도 드려야 하고, 시부모님 그릇도 한 세트, 너희도 하나 해야 하는데_ 이러쿵저러쿵 엄마만의 딸 시집보내기 왈가왈부가 시작되었다.
" 엄마 그만해! 우리 하지 않아도 될 건 그냥 넘어가고 간소화하기로 했다니까. " 하는 나의 짜증스러운 말에도 간소하게 하니까 이 정도라며, 그리고 먹고살기 힘들고 돈 없어 어렵던 엄마가 시집가던 그 팍팍한 시절에도 모두 다 했던 것을 너는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는 식이 엄마의 입장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발품 팔고 사다 나르시는 조선시대를 거친 여사님만의 나름의 신식 개화기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시가에서는 돈이 문제였다. 사실 그게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며 어쩔 수 없는 부분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성과 마음이 있다면 행할 수 있는 것들이 꼭 돈의 문제로만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장남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알아보고 마음 쓰는 부분이 나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딴에는 엄마의 행동이 오버한다 여겨졌지만 기분만큼은 좋았다. 극성이다 싶어 보였지만 나를 생각해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더 느낄 수 있었고, 그 소중한 마음은 예비신랑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데 시모는 무엇을 시작 하기보다는 돈이 없다가 먼저였다. 그러면서 말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였다.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며 준비하는 모든 비용을 알아서 처리하는 부모님과 달리, 시가에서는 비용의 문제로 시작조차 하는 것은 없었지만 말만은 강력하게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 맞다. 시모가 하겠다가 아닌, 우리에게 하라고만 했었다.)
그저 내손에 다이야반지를 껴본다는 것만으로도 입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시모는 처음에 예물 삼종 세트만큼은 꼭 하라고 하셨다. 예물 삼종세트라고 하면 언제부터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다이야 세트 /진주 세트 / 금 세트를 지칭한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예물만큼은 꼭 세트를 갖추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신랑은 결혼식에 드는 비용을 아껴 남는 돈이 있으면 집에 투자할 계획이었기에 간단하게 결혼반지만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 간단한 결혼반지가 실상 반짝이는 다이야였기에 나는 행복했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리 간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금은보화 중에 제일인 그것을 맞추면서 간소화했다고 말하기엔 지출의 강도가 꽤나 센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계속 세트를 강조하셨다. 그중에서도 순금 세트에 집착하셨다. 시모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강조하고 힘주어 말씀하시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금반지 세 개였다. 그 노란 금가락지는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하고 싶은 맘도 없었는데 굳이 꼭 해야 한다며 빼먹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하신다. 하지만 결혼반지만으로도 처음 생각했던 예산은 훨씬 넘어가고 있던 실정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늘희 너 하고 싶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하라- 고 말은 청산유수처럼 하시면서 돈은 보태주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시어머니의 마음만을 생각했다. 두꺼운 금가락지 세 개까지 해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 말이다. 그런데 예산이 맞지 않아 결혼반지만 하기로 했다고 수 없시 말씀드렸지만, 왜 내 말을 듣지 않냐며 진주 세트는 몰라도 금반지 금목걸이 금 팔지를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당장 금 세트를 맞출 여유 비용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이야만큼이나 비싼 거 같았다. 정말 꼭 해야 하는 것처럼 화를 내시며 반복해서 말씀하시길래 그럼 어머님 뜻대로 맞추겠노라 대답했다.
그렇게 수십 번 말씀하시면서 방문 때마다 노란 금을 들고 오지 않자, 마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철없는 아이들을 세워놓고 나무라치시는 모습에 어머님이 직접 해주실 의향이 있겠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알겠다고 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금, 금, 금이란 말을 계속하셨으니 말이다. 맞추고 나면 해결을 해주실 것처럼 금을 가져오지 않는 우리를 혼냈기 때문이다. 같이 가자는 말씀은 없으시니 금 세트를 원하는 모양으로 하고 나면 돈을 주시려고 그러나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결혼식 예산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윽박을 지르면서까지 금을 맞추라고 하진 않으실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시모는 시어머니인 자신의 내 말대로 금 세트를 맞춰라 - 였고 그 예산의 문제는 별개로 아들이 해결하길 바라셨다.
(그래 맞다. 시모가 해주겠다- 가 아닌, 우리에게 하라고만 하셨다.) 예비신랑은 돈도 자르는데 자꾸 하라고만 소리치고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는 어디 알고 계시는 금은방에 가서 맞춰서 가져오시려고 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며 그동안 의중을 알 수 없었던 예비 시어머니가 허구한 날 노래를 부르시는 노란금셋트 사 오라며 삿대질하며 소리치던 태도를 언급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그게 아니라 그냥 무조건 하라는 거라며_ 안 하는 거에만 화를 내고 있는 것이지 맞추라고 도움은 주시진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금 세트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혼자 고민 해왔던 것과 내가 금을 진짜 갖고 싶어 하면 어쩌지_ 생각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모자라는 예산을 채워주시지 않으시면서 금가락지 안 해왔다고 목소리 높여 나무라시는 모습은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너는 왜 시어미가 하는 말을 대체 안 듣는 거냐고 인상을 찌푸리시며 성을 내시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예비신랑에게 돈이 없는데 무슨 금이냐며 진주보석도 생각 안 하고 있는데 저러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되려 내 손이 아닌 자신의 손가락에 금가락지 세개를 가져오라는 말씀이신건가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아들이 비용을 처리하기 바라시는 엄마 때문에 나름 곤욕을 앓고 있는 신랑에게 나는 우리가 서로 결혼하게 된 사실 만으로도 행복하며 내가 다이야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_ 그 반지가 내 것이 된다는 것만으로도_ 내가 살면서 젤 비싼 금은보화를 가졌으니 그 노-랗-고도 노-오-란 금 따위는 안 해도 된다고 말하며 남편이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됨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저렇게 어머님께서 금덩이 안 해왔다고 화내실 건 아니지 않냐고 말했다. 담에 또 저러시면 돈 없으니 어머님 꺼 달라고 하라고 예비신랑에게 말해버렸다. 어머님의 팔뚝에 그 두꺼운 금덩이를 차라리 내게 주었으면 싶었다. 너희 결혼하는데 보태줄 돈이 모자라니 이것을 가지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인식도 못했고 매일 차고 계신 줄도 몰랐던 시모의 팔에 채워져 있는 한창 무거 워보이고 노랗게 빚나고 있는 금덩이가 시어머니가 계속해서 성을 내며 말하시니 어느새 나는 욕심이 생겨버렸다. 내가 말하면 이상하게 받아들이실지 모르니까 그렇게 금, 금, 금은보화를 맞추라고 노래를 부르실 거면 자기가 어머님께 말하는 게 맞는 거 같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정말 예비신랑이 전한 것인지, 어떻게 된 전말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뒤로는 결혼식 때까지 금가락지 세 개 따위의 이야기는 없어졌다.
예물을 좋은걸 해주고 싶은 마음까지만 말씀하시던지, 못하는 사정인데 그걸 하라고 짜증과 성을 내시면서 정작 보탬은 안 해주시면서 말뿐인 시모. 차라리 말을 마시지_ 괜히 나는 금덩어리 하나 받는 건가 내심 기대를 했었다. 시모의 의도와 결론은 너희 돈으로, 자신의 뜻대로, 금 세트를 해라 ! 였다.
그 옛날 예물로 나름의 몇 개 세트를 받았던 엄마는 내가 맞춰온 결혼반지를 보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다이야 반지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내게 그런 말을 꺼내는 엄마를 보니 이것이 정말 섭섭할만한 일인 것만 같았다. 정작 엄마에게 시모의 금타령은 일언반구 꺼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다 그 어려운 시절, 엄마 말 마따라 자신이 시집가던 그 시절에도 받았던 다이야, 진주, 금 세트를 못 받고 결혼하는 나를 엄마는 안쓰럽게 여기신 것이다. 그 마음을 숨기지는 못하고 딸과의 둘만의 자리에서 어렵사리 꺼내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절대 내색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엄마는 책잡히지 않게 이리저리 챙기고 알아보고 발품과 시간을 들여 노력하고 더한 것에 또 몇 개를 얹어 그렇게 준비하고 있음에도 예물세트 하나 격식에 맞춰 못 받는 내게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나의 감정을 나타내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앉아있는 딸의 어두워진 모습에 또 한 번 속상해하셨다.
엄마는 예물은 하더라도 신랑손에 끼여지는 반지 비용은 여자 쪽에서 지불해야 하는 것인데 너희가 벌써 알아서 서로의 반지를 맞추었으니 남편 금목걸이와 시계를 하나 사주라고 나름의 큰돈을 주셨다. 촌스러워 보이고 일수 찍는 무서운 아저씨들이 반팔 니트 티 위에 차고 다니는 금목걸이를 꼭 결혼 선물로 해야 하나 싶었다. 어른들은 모두 금타령인가 싶기도 했다. 나는 이미 그놈의 금이라는 것에 지칠 때로 지쳐있었는데 말이다. 예비 신랑에게 목에 그 노란 순금덩어리를 두르고 싶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동안 자신의 엄마 금 스토리는 까맣게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회사에도 결혼한 기혼남자들은 금목걸이를 차고 다닌다며_ 본인도 하고 싶다고_ 갖고 싶었다고_ 기뻐하고 앉아있다.
현금 예단을 보내던 날 보통의 엄마와 다른 나의 경성에서 날아온 엄마는 알아서 고기 술 과일 떡 또 뭐가 있었더라_ 아무튼 그것들을 포장하는 방법과 방식 그리고 과일은 몇 가지 색을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등의 온갖 전통을 싸잡아서 준비해 두셨다. 술을 담은 비단이며 예단비 봉투를 접는 방식이며 본인이 시집갈 때 어머니가 해주셨던 대로 배워온 것이라며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셨다. 그리고 그것들을 준비하느라 돈이 얼마 들었는지 얼마나 발품을 팔았는지는 지금까지 말도 안 하신다. 그냥 보기에 고생한 티가 너무 나는 정성스러운 모든 것을 모아 딸의 시가에 올려 보낼 채비였다.
아빠는 철학관에 다녀오셨다. 딸은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고 결혼식 날짜는 처가에서 잡아야 하며 혼인의례 서식에 맞춘 그 의미를 담은 연길지(涓吉紙)를 꼭 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랑집에서 사주단자를 적은 사성(四星)을 받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혼인의례 서식(婚姻儀禮 書式)은 한지에 붓글씨로 써야 한다. 한지 규격도 정해져 있는데 약 30센티 / 35센티 정도이고 붓글씨를 쓸 때는 복잡한 글자의 점이나 획 따위의 일부러 생략하여 간략하게 한 글자인 약자(略字)나 획을 흘려 쓴 등의 행서(行書)는 삼가야 하며 반드시 깔끔한 정서(正書)를 써야 한다.
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그동안 언급도 없이 두 분이서 준비하신 한문이 즐비하게 그려져 있는 한지를 보며 간소화할 수 있는 건 하자고 하지 않았냐고 또다시 말하였더니 아빠와 엄마는 그래도 연길지는 꼭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 그렇게 꼭 해야 하고, 있어야 하고, 기필코 거쳐야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던지_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빠 엄마에게 결코 없는 거 같았다.) 신부집에서 혼인 날짜를 택일하여 신랑집에 보내는 서식인 연길지는 신랑 될 사람의 사주를 받으면 둘의 운세에 맞는 결혼 날짜를 규격에 맞는 한지에 써 보내는 것이다. 다섯 칸을 접어서 가운데 3행을 쓴 한 장의 한지와, 혼인 날짜를 보낼 때 함께 동봉해 보내는 편지인 아홉 칸을 접어 가운데 7행을 쓴 연길 서간문(涓吉 書簡文)까지 두장의 한지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아빠가 철학원에 다녀오시기 전에 이미 우리는 결혼 날짜를 잡았다. 결혼 날짜를 어디서 받아오는 대로_ 정해주는 대로_ 식장이 비어있을 리도 없으며 우리는 성수기가 아닌 비수기로 식장 비용이 저렴한 시즌에 우리 편할 때로 이미 예약을 완료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마저도 엄마는 딸은 어미가 시집간 달(그것도 음력으로)에는 식을 올리면 안 좋다며 본인이 결혼했던 그 달만은 피해서 알아보라고 했었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미 정해진 결혼 날짜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철학원까지 발걸음을 하신 이유는 아무리 그래도 연길 서간문은 꼭 써야만 하는 격식이고 예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 본인도 장롱에 넣어두었다는 그 연길지는 엄마의 생이 다해 무덤에 묻힐 때 딸이 태워주는 것이라고 한다. 여자의 인생은 죽음 앞에서도 전통스럽고 유교스러워야 하는 것인지 나는 괜한 의식이 그리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때 한문 2급을 땄던가_ 다 잊어버려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한문은 읽지도 못하겠건만 뭔가 대단한 격식을 갖춘 거 같은 연길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백 프로 미워보이진 않았다. 아빠의 마음이_ 나 잘살길 바라는 바람이, 그리고 우리 딸 제발 책잡히지 않길 손 모아 기도하는 엄마의 모든 뜻이 담겨있는 거 같아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 나는 정말 좋은 부모를 두었구나. 나는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이 세상에 당신들의 딸로 인연이 된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대물림과 전통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는 식의 오래된 격식이 싫었지만_ 그리고 내 자식에게는 물려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_ 아빠 엄마의 마음과 정성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진심이 너무 좋았다. 눈물 날 정도로 고마웠다.
연길지는 우선 비단으로 된 예단봉투와 함께 시가에 갖다 드리고 너희가 신혼집을 구하면 다시 받아와서 장롱 깊숙이 넣고 이사 갈 때도 가장 먼저 챙기라고 하신다. 그렇게 나 또한 죽을 때까지 간직하라는 말씀이시겠지_ 내 주변의 결혼한 사람들 중에 붓글씨로 연길지 쓴 사람은 오직 나하나인데. 혼인의례 서식 맞추신 분 어디 없으신지 찾아보고 싶다.
뒷좌석과 트렁크를 가득 채운 아빠 엄마의 준비물을 받으며 몇백의 돈은 들이신 거 같고 시간이란 시간은 어마어마하게 투자하신 것 같고 이리저리 알아보고 옮겨 다니신 길은 또 얼마나 대단할지 당신들의 딸은 전혀 가늠도, 상상도 못 하겠더이다. 아빠 엄마와 함께 있을 때는 울지 않았는데 그것을 받으시는 시부모님을 보자 눈물이 나려 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는지 고생하셨는지 느껴지고 또 생각났다. 그 의미와 정성을 아는지 모르시는지 사진을 몇 장 찍어 이런 것을 받았다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단톡 방에 올리는 시모가 미웠고, 엄마가 현금 예단을 담은 비단봉투나 편지지 접는 것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 포장한 모든 것들을 아무렇게나 풀러 치워놓는 모양새나 이제는 대단해 보이지 않게 넓부러져 있는 여러 장의 비단 보자기가 이리저리 나뒹구는 모양마저 미치도록 슬퍼 가슴이 메어왔다. 그 보자기 얼마나 소중한 건데..
형식에 맞춰야 한다고 보자기 묶는 법까지 몇 번을 거듭 연습해서 고이 만들어 왔거늘 풀어헤치는 모양새며 모든 것이 내 맘에 들지 않는다. 돈돈 거리시던 시모는 돈 많이 들었겠다며 정성과 호의를 돈으로 치부한다. 나는 눈물이 나는 걸 참았다. 뚝 떨어뜨려버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자리에서 울어버린다고 해서 내 마음을 헤아려주실것도 아닌거 같았다. 한자가 즐비한 연길 서간문은 접는 방식도, 접어야 하는 칸수도 정해져 있는 것인데_ 학교에서 때마다 주는 분기별 가정통신문 종이처럼 아무렇게나 접어버리려 하는 모습에 나는 그것을 낚아채 처음의 모양대로 다시 접어드렸다. 자신은 딸이 없어 다행이라며_ 나는 이렇게 부지런하지 못하다며 말씀하시는 모양새가 뭔가 우리 엄마가 유난스러운 것처럼 느껴지게 말하시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왔다.
생각해보면 시어머니도 시집올 때 엄마 말 마따라 그 없던 시절에 받을 거 받고 할거 했을 것이다. 그때는 유교사상이 지배적으로 배경이 되어 전통과 대물림을 행하던 시절이니 말이다. 아마 엄마가 말하는 해야만 하는 것들이 나보다 많지 않았을까? 아빠 엄마가 보낸 것들을 보시며 시어머니도 장롱 어딘가 연길지가 있다고 말했었다. 본인도 다 해봤고 다 받아왔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 딸이 없어서 난 부지런하지 않다 - 라는 말을 정당화시키며 앉아계시는 모습이 나는 싫었다. 마치 딸 가진 부모는 해야 하는 것이고 아들 가진 부모는 받기만 하는 것인 마냥 너무 속편해 보이셨다. 금을 맞추라고, 너 이거 하라고 공격적인 말만 내뱉으셨으면서 결국 하긴 하되 그 돈은 아들이 처리하길 바라시고 행하시고 신경 쓰는 것은 없으시면서 대접은 받고 싶어 주말에는 보고 싶다며, 그러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신다.
과일 몇 개를 아들에게 싸주시면서 가서 먹으라고 하신다. 그 과일은 결혼 전에 남자 친구 집에서 먹었지만 그 외 다른 우리 집에서 보낸 그 음식들을 나는 맛보지 못했다. 한우고기를 사더라도 품질 좋은걸 사주셨고, 떡은 몇 주 전에 예약하고 올라가서 전해드릴 때까지 따뜻해야 한다며 시간까지 정해서 받아온 것이었다. 그다음 주에 또 시간 되냐, 보고 싶다 부르시기에 엄마가 싸주신 음식으로 한 상 차려주시는 줄 알았지만 그 많은 고기와 음식은 둘째 아들과, 그 외 술과 떡은 시모의 친정 그러니까 남편 외갓집에 가서 풀어서 드셨다고 한다.
보통 여자의 집에서 그렇게 보낸 음식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격식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시모는 그저 자랑하기 바쁜 것 같았다. 같은 마음 일순 없지만 너무 다른 마음 씀씀이와 대접에 나는 조금씩 시가가 미워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 집에는 고마운 답례를 전하시지도 않으시고 엄마의 마음이나 정성은 내가 볼 때 한치는커녕 제대로 느끼시긴 하는 건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날 오후에 부모님께 전화해서 보내주신 모든 것을 잘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시모는 나에게 했던 딸이 없어 다행이라는 말을 엄마에게 또 하셨다고 한다. 딸이 있었음 큰일 날 뻔했다는 시모의 말이 나는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딸 있는 부모만 행하는 격식은 아니건만_
남편은 그날 내내 짜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예비신랑은 대조되는 두 집 안의 보냄과 받음에 나와 아빠 엄마에게 미안해하고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고 보자기를 풀어대는 자신의 엄마에게 "우리 집에서도 좀 뭐 좀 해봐- 맨날 받기만 하지 말고"라는 말을 하며 신경질을 냈다. 앞에 있는 물건에 온신경이 다한 시모는 자식이 짜증이 났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네가 사골 거리를 사가라니까 왜 말을 듣지 않느냐며 다른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그래 맞다. 시모가 하겠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셨다. 아들인 너에게 하라고만 했었다.)
시어머니는 늘 그랬다. 귀농하신 우리 부모님을 뵈러 간다 하면 무엇을 그렇게 가져가라 하시고 사가라고 하시면서 챙겨주시진 않는다. 신랑은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뭘 사야 하는지 내가 알지 못하니 내 부모님처럼 알아서 챙겨달라고 까지 말한다. 시모는 가는 길에 사골 파는데서 사서 주면 된다고 말한다.
신랑이 말한 의도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의미를 담는 것이나 신경 쓰는 하나하나를 전혀 모르는 본인 집안이 너무 답답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남편을 두었기에 서글픈 마음도, 화나는 기분도 접어낼 수 있었다. 결국 결혼 후 이바지 음식을 보냈을 때도 답바지 음식은 받지 못했다. 시모는 갈 때 네가 알아서 사가라고 남편의 결제를 원하셨다. 나는 돈의 문제보다는 그것을 준비하려 하는 마음의 정도에 이미 시가가 미워지고 싫어져 있었다. 엄마가 격을 차려 음식의 종류와 색깔 그리고 포장까지 신경 쓸 때 시어머니는 그냥 좋은 고기 처가에 가져가라 말씀만 하시고 그것의 준비와 결제,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신경 씀이라는 모든 것을 아들과 며느리인 내가 해결하길 바라셨다. 우리는 결국 시모의 뜻대로 그렇게 했다. 남편이 비싼 고기를 고를 때 나는 그 위에 있는 더 비싼 것을 가리켰다. 내 부모님께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한 보따리 차한가득 싣어보내시고 잘 갔는지 우리가 어떻게 전달해드렸는지 연락 없이 그 뒤는 우리에게 맡기신 아빠 엄마와 달리 시가에서는 챙겨주시고 보태주신 거 없으시면서 오직 말뿐인 시모는 이번에도 친정으로 향하는 길목 마디마디 마다 전화하여 사갔냐며_ 어디냐며_ 네가 알아서 하는 거라며_ 그리고 또 언제 오냐는_ 간섭의 연락이 계속 왔었다.
엄마는 이렇게 내게 격식 따지고 예의 맞추며 결혼할 때 해야 하는 각 집안의 예를 다해 말과 돈을 다해주시는데 나는 왜 말뿐인 시모를 만나 그 행동에 상처 받아야 할까? 처가에서 받은 만큼 해주어야 한다고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 놓고 시어머니는 뭐든지 갖춰서 보내드릴 채비를 하는 것이 아닌 자꾸 아들이 직접 알아서 본인은 결코 신경 쓰지 않게 해결되길 바라신다. 이것은 손 안 대고 코를 풀고자 하는 것인지, 우리 집에는 돈을 쓰고 싶지 않고 마음마저 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제발 말이라도 안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받았으니 우리도 해줘야겠다. 뭘 좋아하시냐고 물으시고 당장이라도 답례를 할 것처럼 말만 하시고 그냥 돌아서시는 모습을 볼 때면 엄마가 결혼 전에 우리 집이 어쨌든 약자라고 했던 말이 너무 생각나 눈물이 난다.
딸 가진 부모는 약자라는 생각이 아빠 엄마의 머리와 마음에 늘 자리 잡고 계신다. 딸의 시가에서 해주시는 게 있으면 너무 고맙고 감사하지만 안 해주시더라도 그러려니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다. 나에게 시가에서 화가 나고 불만이 있더라도 참으라고 하신다. 모든 사람 다 나와 같은 맘일 순 없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렇게 엄마는 결혼 전부터 자신보다 몇십 년 어린 예비신랑 앞에서 우리가 약자니까 잘 봐달라고 부탁을 했더랬다.
사람과 친해지는 데에도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을 보면 더 가까워지기가 어렵다. 하물며 시어머니인 손윗사람이라고 할지 라도 말이다.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나이 먹은 그 윗사람에게조차 내가 이런 마음을 느낀다면 시어머니를 시어머니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매일 하면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받은 것은 기쁘고 온갖 자랑질을 하시면서, 친구들의 카톡방에서 그날의 주인공이 되어 만족스럽지만, 그러한 보답은 본인이 신경 쓰지 않고 시간들이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가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신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굉장히 위에 서있는 어른의 요구를 원하신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어른으로서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시어머니 대접받기'를 바라야 하는 것 아닐까_
아이러니하게도 말뿐인 시모는 그런 행동을 보여주시면서도 자신은 세상에 둘도 없는 며느리를 최고로 배려하는 시어머니인 줄 생각하고 있으시다. 자신이 시집살이를 오래 했기에 그 심정 알아서 너 불편할까 많은 것을 배려하신다고 생각하신다. 언제부터인가 삐걱거리던 관계를 내가 어쩌면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상처를 덜 내기 위해 연락을 룰을 정하고 잦은 방문을 피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시어머니가 하시는 말을 상기시키며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답답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시가에서도 나를 위해 값비싼 갈비탕 재료 묵직하게 챙겨 주기도 하셨고, 제주도 여행길에서는 아빠 엄마 집으로 옥돔도 보내주셨다. 해주시는 것보다 나에게 상처 주신 것이 더 많아 그마저도 잘 생각이 안나는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동안 엄마는 사돈댁 자랑을 오직 옥돔으로만 하고 있고, 나는 갈비탕을 선호하지 않는데 당신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그것을 받으면서 나 위한다는 말로 전해 들으며, 그 고기를 오랫동안 끊여대야 했던 나는 시월드에서 받은 것마저 불평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