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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집 Sep 14. 2024

옛날 소설이 나를 찾아왔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인연이니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 관계다. 친구와 나는 예전부터 편지를 주고받고, 소설을 쓰면서 서로의 글을 읽고 의견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 시절의 우리는 늘 책을 읽고, 기록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까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어떤 사람이 될까, 어떤 존재로 세상에 기억될까에 온전히 집중하던 빛나는 시기. 그때 우리는 보고 느끼는 많은 것들에 대해 기록하고, 그 흔적을 남기는 데에 한껏 노력을 기울였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 삶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잘 알고 지내던 친구와 소원하게 지낸 것은 아무래도 내가 결혼을 하면서 아이가 생기고,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듯하다.

30대 이후의 시기는 매일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동동거리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나와 아이의 성장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나니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을 다시 돌아보는 순간의 여유가 겨우 생겼다.     


친구는 내게 오래전 내가 썼던 단편소설을 내밀었다. 20대의 어느 날 지금은 사용할 수도 없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틈틈이 써서 과방에서 프린트해 친구에게 읽어달라며 건넸던 소설이라 나에게는 저장된 파일도 프린트해둔 기록물도 없는 것이었다.     


제목조차 기억에서 지워버린 소설이 내 손 안에 전해지자 가슴속 깊이 넣어두었던 어떤 시절의 욕망과 열정이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때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함께 했는데,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미완의 기록을 공유하고, 날 것 그대로의 속살을 보여줄 수 있는 사이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 버렸을까.     


친구는 여러 번 이사하면서 물건을 정리하다가도 내가 쓴 소설을 쓰레기로 버릴 수가 없어서 매번 들고 다녔다고 했다. 아주 재미있거나 항상 읽어보는 것은 아니었어도 아무렇게나 처리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 번씩 나의 소설을 다시 읽을 때마다 어떤 생각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늘 도전하던 그 시절의 우리를 기억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 아니라 친구에게도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공동의 시간이었다.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왜곡되지 않은 미숙하고, 생생한 원석 같은 시간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렇게 기록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고 스스로 숨을 쉬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옛날 소설이 시간을 거슬러 나에게 다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친구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의 기록을 소중히 여겨주었기 때문이리라.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날의 기록이 나를 찾아왔을 때 이미 오래전 잃어버린 나의 20대가 슬그머니 소환된 기분이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차마 버릴 수 없는 기록들이 있다. 누군가의 글씨들, 내게 의미 있는 말들, 책 사이사이 써뒀던 글귀들, 어떤 시절을 관통하는 일기, 누군가 내게 마음을 전했던 편지들은 그 시절의 나를 살려내고, 돌아보게 만들고, 어떤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화선이 된다.     


지금 내가 하는 일도 어떻게 보면 기록을 통해 어떤 이들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4.3의 광풍 속에서 희생되고 사라져간 희생자들의 삶을 꿰어맞추고, 피해실태를 살피고, 그들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주기 위해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     


희생자 명부와 희생자 결정 심의서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마지막을 들여다보면 어쩌다 이들은 일상을 잃어버렸을까 하고 순간 아득해진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누군가의 증언으로, 신고서로, 마을 사람들의 소문으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행방불명이 된 이들은 어떤 경위로 죽음을 맞았는지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흔적을 찾지 못해 헤매다 형사사건부에서 이름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아 이때 이 사람은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었구나’ 하고 그 사람의 시간을 재구성해보며 탐정처럼 흔적을 쫓는다.     

 

4·3은 끝났지만, 사건은 어떤 시간 속에서 어떤 기록 속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시절의 기억을 뚝 떼어낸 채 살아갈 수 없었던 희생자의 유족들이 자신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희생자들이 남긴 흔적들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남기는 무심한 어떤 기록들은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형무소에서 온 편지, 엽서 한 통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몇십 년을 버텨온 유족들도 있었다. 그만큼 기록은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고, 시간을 생생하게 만들어낸다.     


기록이 가진 가장 큰 힘은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미지를 끌어내 준다는 것이다. 쓰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것, 쓰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그 기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시나브로 어떤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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