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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이월의봄날 Oct 13. 2024

첫눈이 오면...

‘ 찬 공기가 남하하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기다리던 눈 소식이 있는데요. 전국 대부분 기온이 크게 떨어지고 정오가 지나면서 눈발이 내릴 것으로 예상…’

기상 캐스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핸드폰을 집어 든다.


[ 오늘 눈 온대…]


짤막하게 문자를 보내 놓고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지난겨울에 사둔 회색 앙고라 목도리를 대충 칭칭 감고, 현관 앞에 있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아!’ 그제야 커플 템으로 사둔 Y의 목도리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나이 마흔을 넘긴 만난 지 이십 년 차에 커플 템이라니…

살짝 웃음도 나오지만, 오늘은 기다리던 첫눈이 오는 날이 아니던가!

없던 사랑도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설렘 가득한 첫눈 오는 날.

해마다 이 좋은 날에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한 날.

영원을 약속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기쁜 날, 슬픈 날은 혼자 있지 말자 약속했다.

두 뺨으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옷깃을 단단히 여민다.

시리도록 파랬던 하늘이 점차 하얀 빛깔로 물들기 시작한다. ‘곧 내리겠는데?’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번 내리실 역은 명동, 명동역입니다. 내리시는 문은 오른쪽입니다.]


명동역 3번 출구. 퍼시픽 호텔 앞.

표정 없는 Y가 구스 숏 패딩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있다.

그의 뺨에 사라락 스치듯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살짝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Y가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모아 하늘을 향해 폈다.

그의 손바닥 위에 힘없이 내려앉는 눈송이가 스르륵 녹아버린다.


“많이 기다렸어?”

“왔나! 가자… 춥다!”

“잠깐만…”


재촉하는 그를 달래며 챙겨 온 목도리를 건넨다.

힐끗 내 목을 한번 보던 그가 마지못해 휙 자기 목에 감고는 앞서 걷기 시작한다.

남산의 둘레길을 따라 조금 얼마쯤 올라왔을까?

점점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사라락 내리는 눈이 나무 위로 소복이 우리가 걷는 길 위로도 쌓이기 시작했다.

두어 발 앞서가던 Y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손을 내민다.

‘어쩐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추워 두 뺨이 빨개진 내가 총총 뛰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온기로 가득한 그의 손.

나쁘지 않네 싶은 그 따스함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어느새 사방은 온통 하얗게 눈 덮인 세상이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고, 스치는 눈의 감촉이 차갑지만 한없이 보드랍다.

소복이 쌓인 길 위에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다.

‘뽀드득뽀드득’ 내딛는 발걸음에 쌓인 눈이 노래한다.

서울 도심의 눈 덮인 모습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전망대 입구로 들어서자,

사랑하는 연인들이 변하지 않을 마음을 기원하며 걸어뒀을 수많은 자물쇠들이 보인다.

그 마음 모두 변하지 않고 사랑하고 들 있을까?

적어도 서로의 이름과 날짜를 적어 걸어둘 때만큼은 사랑이 충만하고, 변치 않음을 약속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었으리라…

우리는 천천히 남산 성곽길 산책로를 따라 말없이 걷는다.

마주 잡은 손의 온기가 꽁꽁 언 마음을 녹인다.

발끝의 감각이 무뎌지고, 두 사람의 어깨 위에도 소복하게 눈이 쌓인다.

한참을 말없이 내려오던 Y가 편의점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다.


“호빵 하나 먹을래?”


온 세상은 하얗게 물들었고, 손 위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빵을 한입 베어 물면

온 세상이 달콤함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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