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상종이라고!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반가운 문자가 왔다. '내 사과 무사하냐?'
긴 장마와 폭우로 내가 살고 있는 충주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이곳에서도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로가 유실되고, 심지어는 인명피해마저도 발생했다는 소식이 방송에 나오자, 그날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비 피해는 없고?" 그래도 우리 집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도시에 살고 계신 분들에게는 아무래도 집중호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 시골집이 심히 걱정이 되었나 보다.
이렇게 다른 분들은 우리 집과 식구들의 안부를 묻는데, 친한 친구란 녀석은 달랑 문자 하나만을 보내왔다. 그리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자기가 먹을 사과는 무사하냐'라니... 만약 문자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런 싹수없는 친구는 아예 만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친구에 대한 걱정이 담긴 배려 깊은 문자다. 평소에도 유난히 표현하는 법이 서툴러서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는 분명히 속내 깊은 친구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주위에는 하나같이 이렇게 표현이 서툰 친구들만 있는 것 같다. 하긴 은퇴한 장년의 남자치고 사근사근한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러는 나는?
원래 충주는 예로부터 자연재해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귀촌을 한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 피해를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우리나라를 강타했을 때, 사과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사과가 좀 많이 떨어졌다. 그 이후로는 이렇다 할 피해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올해 54일간이라는 긴 장마를 맞이했고, 그 안전하다는 충주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워낙 폭우가 쏟아지니 계곡에서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내려왔고, 아름드리나무가 토사에 밀려 함께 떠내려왔어!" 피해 현장을 목격하신 한 형님의 증언이다.
전문가들은 이 긴 장마의 원인을 북극의 온난화 때문이라고 한다. 온난화로 북극의 기온이 10도 높은 상태로 지속되면서 기류에 영향을 끼쳤고, 북극의 찬 공기가 고온 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과 만나 장마전선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론적인 설명은 알겠는데, 정작 문제는 이런 현상이 올해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데 있다.
농사를 짓다 보면 특히 기후에 민감해진다. 우리나라의 기온 상승률이 유난히 높아 21세기 말경에는 사과를 재배할 수 없다는 기후 평가보고서도 있는 것을 보면, 주위에서 사과재배 농가를 구경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우리 집 사과 과수원이야 그보다 훨씬 전에 없어지겠지만... (언젠가 아내와 심각하게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아내는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지긋지긋한 과수원을 가차 없이 팔아버릴 거라고 한다.)
해마다 이상 기후라고 방송하는 것을 보면 요즘은 자연재해도 수시로 발생하는 것 같다. 그래서 농지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시골집은 폭우가 오더라도 물에 잠기지 않고, 눈이 오더라도 차가 다닐 수 있는 곳에 지어야 한다. 그리고 이번 경험을 통해 한 가지 더 알게 된 것은, 산 가까이에 붙어있는 땅도 주의하여야 한다.
집 지을 당시만 해도 우거진 숲으로 괜찮아 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땅 임자가 멀쩡하던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만들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산사태는 이렇게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파헤쳐 놓을 때 발생한다. 몇 년 전 우리 집 윗 언덕에 인삼밭 만든다고 땅을 다 파헤쳐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갑작스러운 집중호우로 앞마당까지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와 고생한 적이 있었다.
긴 장마가 끝나고 과수원을 둘러보니, 사과가 한 바구니 정도 떨어졌다. 또 자연 낙과가 심하기로 유명한, 딱 한 그루 있는 우리 집 복숭아도 (이름: 서왕모) 절반은 떨어진 것 같다. 이 복숭아는 비바람이 아니래도 어차피 떨어질 것들이긴 했다. 대추는 긴 장마로 꽃이 수정이 되지 않았는지 거의 매달린 것이 없다. 이 정도라면 사실 우리 집은 피해랄 것도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내 주위의 다른 농가들을 생각하면 너무 안쓰럽고, 또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래서 이래저래 힘든 게 농사인가 보다. 특히 요즘 날씨에는.
긴 장마와 다시 유행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친구들을 만난 지도 제법 오래된 것 같다. 이제는 새롭게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렵고, 또 예전에 알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느덧 하나둘씩 사라지거나 잊혀 가고 있다. 그래서 무뚝뚝한 친구들이라고 하더라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면, 그리고 이따금 한 번씩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면 행복하다. 그러니 아무리 짧고 무뚝뚝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친구가 보내온 문자가 기쁘기만 하다.
'사과는 괜찮고 복숭아만 좀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
그것으로 오랜만의 대화가 끝났다. 끝내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유유상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