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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때로는 혼자이고 싶다

나도 아직은 섬세한 남자다


"정말 같이 가지 않을래?" 와이프가 벌써 몇 번째 물어보고 있다. "난 괜찮으니까 잘 다녀 오래도!" 와이프는 같이 가자고 하고, 난 그냥 혼자 집에 남아있겠다고 버티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와이프가 친구들과 함께, 섬에 있는 친구네 별장으로 놀러 간다고 한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인데도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을 보면, 날 내버려 두고 혼자 놀러 간다는 게 조금 미안하거나, 아니면 틀림없이 운전기사가 필요해서다.


은퇴한 남편을 젖은 낙엽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평소 같으면 당연히 혼자 집 지키기 싫다고 어디든 따라나섰을 터인데, 이번에는 그냥 집이나 지키고 있겠다고 하니 아무래도 이상한가 보다.


아직 바쁜 농사일이 끝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설사 농사가 아니더라도, 난 맨 정신으로 여자 3명이 가는 여행에 끼어갈 리가 없는 위인이다. 그런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서 1박 2일을 보내느니, 차라리 집에서 혼자 밥을 해 먹고 말지! 그래서 잘 놀고 오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와이프를 떠밀어 보냈다.


하지만 내가 집에 남기로 했던 또 다른 이유는, 나도 때로는 혼자이고 싶기 때문이다.


평소에 혼자서 밥 차려 먹는 것을 싫어하니, 와이프는 내가 하루도 혼자서는 못 사는 줄 안다. 하지만 나도 며칠 정도는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고! (미리 해 둔 밥과 반찬을 꺼내 먹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기간이 좀 길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언젠가 지인들과 모여 수다를 떨다가, 와이프가 나를 가리키며 "밥이야 전기밥솥이 해 준다고 치고, 당신이 반찬을 만들 줄을 알아, 빨래를 할 줄 알아? 당신은 자생력이 전혀 없다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에 "햇반이 더 맛있어요"라고 조언을 해 준 사람도 있고, 날 보고 '간 큰 남자'라며 부러워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장년의 남자에게 자생력이 없다는 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말다툼하고 나서 밥 얻어먹으려면 내가 먼저 꼬리를 내려야 한다. 더구나 나이 먹으면 여자가 점점 더 드세진다고 하니, 내가 지금처럼 무작정 버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제는 요리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까 보다.


예전에는 내가 우리 집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말에 우리 식구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자리만 지키는 가장 취급을 하더니만, 지금은 사고나 치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면 좋겠다는 표정들이다. 겉으로는 내가 그저 별 생각도 없이 늙어가는 한 평범한 남자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도 아직은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섬세한 남자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젊었을 때는 여자분들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 어느덧 남자들이 그렇게 변한다.


우아하게 커피를 내려 먹는다. 케이크도 한 조각 있으면 더 좋고! 갑자기 내 삶이 달라진 것 같다.

오랜만에 혼자 집에서 있으려니 외롭기는커녕 자유로움을 느낀다. 물론 며칠만 지나면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좋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느긋하게 아침을 차려 먹었다. 우아하게 커피도 뽑아먹고 (인스턴트커피가 아님), 평소에는 하지 않던 설거지도 흥얼거리며 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는 평범한 하루겠지만, 갑자기 내 삶이 달라진 것만 같다. 오늘 하루만큼은 텃밭에 나가 일 할 마음도 없고, 정말로 우아하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길 생각이다.


낮에 아들 녀석이 전화를 했다. "아빠, 저 오늘 일이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요. 저녁식사 혼자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나 혼자 저녁을 먹는다고 하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철이 좀 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는 일찍 들어왔나? "그럼 괜찮지. 걱정 마. 천천히 와도 돼!" 그래도 마음을 써주니 고맙다.


그런데 정작 미안한 척하며 떠났던 와이프는, 1박 2일 동안 전화 한 통도 없다.


'역시 운전기사가 필요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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