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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 나이 들면 사람이 그립다

기다림! 노부부에게 명절이란 기다림이다

by 새침이와 호돌이네

며느리:

추석이 가까워지니 시댁에 갈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정부에서 귀향이나 성묘를 자제해 달라고 하니 올해는 오지 말라고 하지는 않을까 기대도 해 보지만, 시댁으로 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다. 혹시 어린아이 핑계 대고 가지 않으면 안 될까? 하지만 명절에 시댁에 가야 한다는 건 이미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명절이면 의례 남들도 다 하는 일. 그러니 나만 못 간다고 할 수도 없고, 시댁에 가긴 가되 가능하면 빨리 탈출하는 게 상책이다. 설사 친척들이 다 모이는 종갓집의 큰 며느리가 아니라고 해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차례를 간소하게 지내고 시어머니가 방에서 쉬라고 이야기 한들, 명색이 며느리인데 곧이곧대로 방에 드러누워 버릴 수는 없다. 또 아무리 자상한 시부모라고 해도 내 부모처럼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남편:

아내가 날카로워져 있지만 중간에 끼어있는 나도 힘들다. 짧은 연휴에 본가도 가야 하고 처갓집에도 가야 한다. 일 년 내내 들볶이지 않으려면 주방에 매여있는 아내 눈치도 수시로 봐야 하고, 오랜만에 한껏 들떠 계시는 부모님들 기분도 맞춰 드려야 한다. 또 막히는 도로에서 시간 다 까먹지 않으려면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 차라리 명절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이 명절증후군은 며느리와 아들에게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는 부부가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 있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모든 모임이 중지되었다), 작년에 명절을 지내고 나서 하신 말씀들이 생각이 난다. 시부모들도 꼭 마음이 편하지 만은 않은 것 같다.


기다림! 노부부에게 명절이란 기다림이다. 일 년에 한 번 자식들이 집에 오는 날. (출처: 영화 '온딘'중에서 사진 캡처)

"이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혹시 젊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더욱 조심하게 된다. 어쩌다 자식들한테 전화가 와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세상 사는 게 바쁘니, 먼 길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그랬더니 자식들 얼굴, 정말 일 년에 한두 번 보기도 힘들다. 또 어쩌다 와서 하룻밤 자고 나면, 바쁘다고 훅 가버린다. 그러면 다시금 부부만 남게 되고 집안은 더욱 썰렁해지는 것 같다."


평생 시부모를 모시고 사셨다는 분이 말씀하셨다. "시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명절 때면 손님도 많이 오고 해야 할 일도 엄청나게 많았었다. 그래서 명절이 싫었고, 또 명절 후에는 앓아눕곤 했는데 이제 아무도 계시지 않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지나고 보면 그래도 사람들이 북적거릴 때가 좋았던 것 같다."


그나마 시골 토박이인 분들은 입장이 조금 낫다. 시골 마을은 집성촌인 경우가 많아서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서 산다. 그래서 지금도 명절이면 큰 집에 친척들이 모여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눈다 (물론 며느리들은 정신없이 바쁘다). 그러나 이젠 남아있는 또래의 친척들도 얼마 없다. "우리 세대 죽고 나면 더 이상 친척들이 모이지도 않을 거야."


자식이 없으신 부부도 계시다. 그분들은 명절 아침에 간단히 차례 지내고 나면, 그냥 멍하니 TV나 본다고 한다. 올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이 모임에 참석하시는 대부분의 부부가 우리보다는 나이가 많으시다. 그래서 몇 년 후면 다가올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 같다. 그분들에게 명절이란 기다림이다. 일 년에 한 번 자식들이 집에 오는 날!


나야 아들놈이 아직 장가를 간 것도 아니고 직장도 집에서 다니니, 아직까지는 다른 분들의 서운함이 직접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아들놈이 결혼을 하고 어쩌다 한 번 집에 왔다가 곧바로 사라진다면,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고 해도 가슴으로는 서운할 것만 같다. 결국엔 우리 부부도 받아들여야 할 시대의 흐름이고 변화이겠지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우리 집은 남들처럼 딸도 없다.


이제는 명절이라고 어쩌다 모인 식구들이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가고 나면, 홀가분함보다는 서운함이 크다. 그리고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는 것은 나도 늙어간다는 것일 게다. 갑자기 텅 빈 집안에 아내는 TV 볼륨을 크게 높일 것이고, 나는 할 일도 별로 남아있지 않은 텃밭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남는 것은 부부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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