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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틀림없이 꼰대가 아닐 거야

애처로운 꼰대로부터

by 새침이와 호돌이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꼰대 체크 리스트'를 발견했다. 총 15개의 항목으로 되어있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과연 나는 어떨까? 물론 나는 아직까지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므로 꼰대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나이를 생각하면 초기 꼰대 정도는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의 지론은, 나이가 들더라도 항상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런 나의 바람직한 자세가 나를 아직도 젊게 만들어 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행여 나에게 꼰대 기질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심각해지기 전에 빨리 찾아서 고쳐야 한다. 그래서 꼼꼼하게 항목들을 읽으며 체크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체크 리스트는 '꼰대 김철수'란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라고 한다.


'내가 한때 잘 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그렇다. 특히 잘난 체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어쩌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내 직업을 묻기도 하는데, '그냥 농사짓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면 갑자기 말투가 바뀐다. 그럴 때면 은근히 속이 뒤틀려, 나도 한때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음을 알려주고 싶다.


'나보다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꼭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나도 그들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와이프 앞에서는 좀 자랑을 많이 하는 편이다. "나만큼 농사도 잘 짓고, 목공 작업도 잘하고, 글도 열심히 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물론 이렇게 상이한 분야 세 가지를 모아서 열정적으로 잘하는 사람은 없겠지. 혹시 따로따로면 몰라도... 와이프는 이런 나를 보고 기가 막혀한다.


'내가 너만 했을 때'라는 말을 자주 한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인생의 선배로서 답을 제시해 줄 수 있다'.


특히 아들놈에게 조언을 많이 해준다. 그래서 인생 선배답게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빠 경험에 의하면..." 그럴 때면, 아들놈은 '또 시작하는구나'라는 눈빛이 스쳐 지나가고, 기회만 엿보다가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내 소중한 경험을 공짜로 말해주는데도 영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 또 있다. 귀촌 선배로서 시골로 내려오시려는 분들에게도 기꺼이 조언을 해드리고 있다. 집 지을 때는 어떻게 하고, 텃밭 채소는 어떻게 키우고, 유실수는 무엇을 심어야 하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맺기가 힘들 정도다. 넋이 빠진 손님이 떠나고 나서 와이프가 말했다. "오늘도 당신 혼자서만 말하고 끝났네!"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면 내가 먼저 답을 제시했다'.


"점심 뭐 드시러 가실래요?" 미사 끝나고 친하게 지내는 교우들에게 말했다. 자매님들 의견이 분분하다. "오랜만에 돈가스 먹을까?" "쌈밥은 어때?"... 중간에 내가 끼어들었다. "얼큰하게 짬뽕 먹으러 가지 않을래요?" 와이프가 나중에 말했다. "어차피 짬뽕 먹으러 갈 거면서 묻기는 왜 물어?"


'후배가 커피를 대령하지 않으면 불쾌하다'.


당연하다. 형님들과 식사가 끝나갈 때쯤이면 눈치 빠른 내가 재빨리 커피를 가져온다. 그런데 후배와 식사를 할 때 후배가 커피를 가져올 생각을 하지 않으면 괘씸해서 째려본다. '저 녀석은 눈치도 없어!'


행여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하고 커피를 가져오려 하면, 여자분들이 반사적으로 먼저 일어난다. "앉아 계세요. 저희가 가져올게요." 아마도 평생 해오신 습관 때문일 거다 (아마도 시골에 사셔서 더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이제야 뭔가 억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소한 일에도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는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은 하지 않고 세상 탓만 하는 것 같다'.


맞다. 요즘 젊은이들, 특히 아들놈을 보면 눈빛에 독기가 없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려는 투지가 없다. 우리 젊었을 때는 밤 10시 이전에는 퇴근이란 걸 해 본 적도 없다. '워라벨?' 그런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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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리스트들을 체크하면서 뭔가 찜찜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리스트에 있는 내용들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이렇게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로 체크 리스트를 만들고 그것으로 꼰대를 판별한다니 말이다. 아무래도 남아있는 항목들에는 좀 더 관대하게 대답을 해야겠다.


나중에 내가 체크한 항목들의 개수를 세어보니 11개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눈치가 빨라 중간에 알아차렸기 망정이지, 곧이곧대로 체크했다가는 완벽한 꼰대가 될 뻔했다.


6~11개: 꼰대 경보. 맙소사! 당신은 이미 꼰대가 되었습니다.

12~15개: 고 위험. 완벽한 꼰대 시군요. 자숙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끝에는 친절하게도 두 종류의 꼰대에 대해서 설명도 해 주고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꼰대가 있다. 자신이 꼰대인 줄 알면서 꼰대 짓 하는 꼰대. 자신은 꼰대가 아니라고 확신하며 꼰대 짓 하는 꼰대. 전자는 몇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밉지만, 후자는 딱하고 가엽고 불쌍하고 안쓰럽고 애처롭다.'


그렇다면 나는 '딱하고 가엽고 불쌍하고 안쓰럽고 애처로운 꼰대'였나?


아무래도 세상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나 보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휴우~


P.S. 시간 있을 때 한번 체크해보세요. <애처로운 꼰대로부터>


<사진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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