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갈 곳이 없다

은퇴하면 주도권도 바뀐다

by 새침이와 호돌이네

은퇴 후 부부가 시골로 내려와 살다 보면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할 시간이 길어진다. 밖에 나가봤자 갈 곳도 마땅치가 않고, 또 농사일이라고 하는 것이 함께 해야 효율도 오르는 법이다. 농사일은 1+1=2가 아닌 3 이상이라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분야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부부가 24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자주 티걱거릴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지금은 싸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현명한 진리를 터득하고 있지만, 귀촌 초기만 해도 내가 그렇게 만만한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전부 이끌고 시골로 내려올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돈 벌어오는 일이 끝나면 주도권도 바뀐다. 그것을 재빨리 간파한 남편은 아내 비위를 맞추며 평화로운 가정을 이끌어가겠지만, 착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편은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나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 수많은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지금도 주도권 싸움이 진행 중인 친구들도 있으니까! (아직도 돈 버는 친구들만 큰소리치며 산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난 한동안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후자에 속했다.

도서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의 표지 사진

초창기에는 나도 당연히 아내와 말다툼을 많이 했다. 한 번은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고향도 직장도 떠나 시골로 왔으니 친구를 만나려면 차를 타고 두어 시간은 달려가야 한다. 시골 와서 사귄 분들도 계시지만 부부 싸움했다고 달려가서 푸념을 할만한 사이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화로 친구에게 하소연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일 분만 지나면 지겨워하며 이렇게 말할 놈들뿐이다. "네가 잘못했네. 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이 전화를 끊어버릴 것이다. 어떻게 내 주위에는 진득하게 내 푸념을 들어줄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시골길을 빙빙 돌았다. 밥맛도 없었고 혼자 밥을 사 먹기도 어색해서 배 쫄쫄 굶어가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도시라면 다르겠지만 시골은 아직도 식당에서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예전에 아내가 집에 없을 때 혼자 식당에 간 적이 있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물으셨다. "아니, 왜 혼자 식사를 하세요?" 나이 들어 혼자서 밥을 먹으러 가면 괜히 처량하게 쳐다보는 것 같고, 자칫하면 혼자 사는 남자로 오해받기 딱 좋다.


그때 굳게 결심한 게 있으니 앞으로는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다시는 집 밖으로는 나가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래 봤자 나만 손해니까. 내가 밖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 아내는 따뜻한 집에서 밥해 먹고 TV 보며 낄낄거릴 것이다.


아내들은 갈 곳도 많다.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친구를 사귀니 항상 주위에 친구가 많다. 또 멀리 있는 친구 만나러 두세 시간쯤 차를 타고 가는 것도 당연히 여긴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전화통 붙들고 몇 시간 이야기하면 된다. 친구들과 그 정도 통화하는 것쯤이야 늘 있는 일이니까.


특히 자식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들은 더 좋은 도피처가 생긴다고 한다. 화가 나면 손자 손녀들 돌봐 준다고 자식 집에 가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남편은 자식 집에 따라갈 수도 없다. 또 가봤자 환영받지도 못한다. 그러니 집에 남아 혼자 밥을 해 먹으며 집이나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다. 젊었을 때 아내 속 썩이고 목소리 컸던 남편분들 중에서 이렇게 사시는 분들이 특히 많은 것 같다. 아마 속으로 찔리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이래저래 나이 들면 남편에게 유리한 상황은 없다. 그래서 은퇴 후, 남편들은 상황 판단을 잘해야 한다. 싸움이 나지 않도록 아내 비위를 맞추며 사는 게 최선이고, 행여 싸우게 되더라고 절대로 집을 나서서는 안 된다. 그냥 끝까지 집에서 버티고 있어야 밥이라도 얻어먹는다.


나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는데, 분위기가 싸늘해지면 무조건 과수원으로 달아나 버린다. 그리고 이따금 억울한 생각이 들고 화가 풀리지 않으면, 애꿎은 나무를 걷어차기도 한다. (물론 내 발만 아프다).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때로는 은퇴한 남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러는 아내라고 마음이 편하기야 하겠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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