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만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내 팔자가 행복한 건지도 모른다
유난히도 농사짓기 힘들었던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한평생 농사를 지어오신 분들조차 올해 같으면 더 이상 농사짓기 힘들다고 하신다. 물론 배운 게 농사뿐이니 힘들다고 그만둘 수야 없겠지만은,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재해로 한숨이 깊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농사는 본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늘도 도와주어야 한다.
얼마 전 60대 중반이신 한 형님을 만났다. 귀농하신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해보지 않은 농사가 거의 없으시다. 이른 봄부터 브로콜리를 심으셨고, 감자, 고추, 옥수수 그리고 가을이면 김장배추까지 심으셨다. 나중에는 과수가 돈 된다고 사과 과수원까지 임대하셨다.
그런데 무슨 농사를 지어도 소득은 쥐꼬리만 하고, 고된 육체노동으로 예전에 없던 관절염도 생겼다고 하신다. 급기야 경운기 벨트에 걸려 손가락을 하나 잃으시고는 농사일은 아예 접으셨다.
그런데 막상 농사를 그만두니 직장을 찾기가 쉽지가 않으셨나 보다. "이 나이 되니까 받아주는 곳이 아무 데도 없더라" 하신다. 다행히도 지금은 조그마한 공장에 경비로 나가고 계신다.
60대 중반이면 아직 한창인 것 같은데 남들은 완전히 폐물 취급을 한다. 직업의 귀천을 따질 나이도 이미 지났고, 먹고살려니 꾹꾹 눌러 참고 일하러 간다. 나이 들면 잘하는 게 참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과연 그 형님이 일하시며 행복하신지는 잘 모르겠다.
때로는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만 있으면, 여기저기서 눈총 받지 말고 차라리 집에서 속 편히 노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놀면 정말 속이 편해질까? 과연 그런 생활이 일상이 되어도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노는 게 능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엉뚱해 보이지만, 독일에서 사회복지 기금 수혜자였다가, 복권에 당첨되어 백만장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갑자기 돈이 많아지자 멋진 빌라를 사고, 하루 종일 집에서 어슬렁거린다. 11시에 일어나 맥주를 4병이나 마신다. 무료함을 피하기 위해 1년에 9번이나 장거리 여행을 하고, 부인과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있지만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되어 몰아볼 수도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부자들의 생활을 따라 해 보지만 아무런 행복도 느끼지 못한다. 아직 돈이 많아 일을 할 필요도 없지만, 그 상황이 오히려 저주와 같다.' (출처: 소박한 삶 - 레기네 슈나이더)
느긋하게 11시에 일어나 맥주를 4병이나 마시고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릴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한 건가? 어쩌면 은퇴한 많은 사람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대부분이 백만장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하지만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남아있는 긴긴 세월을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그 삶이 바로 지옥이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직까지 몸도 건강하고 한창 써먹을 수 있는 나이이니까 말이다 (물론 본인 생각이지만). 그렇지만 일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고, 돈이 많아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주위에 돈 걱정 없이 여유 있게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명도 길어졌다는데, 난 남은 인생을 적어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손바닥만 한 땅에서 (손바닥만 해서 정말 다행이긴 하지만) 농사라도 짓고 있는 내 팔자가 어쩌면 행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으니까.
그냥 놀아도 뭐라는 사람이야 없겠지만은, 그래도 적당한 노동 후에 갖는 휴식이 더 달콤한 법이다. 하지만 반대로 나이 들어서까지 일에 치여 살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 모든 것이 나이에 걸맞게 적당해야 한다. 일도 휴식도.
나의 이런 말에 한 형님이 바로 반론을 제기하셨다. '그렇게 놀고도 먹고살 수만 있다면 난 아주 행복할 것 같다'라고 하신다. 한 평생 죽어라 일을 했는데도 먹고살기가 힘드니, 그런 말을 하는 건 어쩌면 배부른 소리라고.
문득 검게 그을린 그 형님의 얼굴에서 한 평생 고단하게 보냈던 농사꾼의 삶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니 딱히 뭐가 맞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정말 요즘 같은 세상이면 그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할 일이 있는 게 좋던데……
어쩌면 그 형님 말씀처럼 배불러 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