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일기 중에서>
올봄에 장에 가서 모종들을 구입할 때였다. 토마토, 오이, 고추 등 모종을 고르다가 가지 차례가 됐다. "가지는 한 포기만 주세요." "한 포기요? 아무리 적어도 두 포기는 심으셔야죠!" 내가 초보 농사꾼처럼 보였는지 모종 파시는 아주머니는 모종의 수량까지 정해주셨다. 예전 같으면 아주머니의 말발에 넘어갔겠지만 이젠 어림도 없다. "아뇨. 한 포기면 돼요!"
전문 농사꾼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융통성도 없이 딱 한 포기면 된다고 우겨댔으니 조금은 답답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모종이 죽어봐야 저런 말을 하지 않지!’ 대놓고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런 표정이시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굳이 필요도 없는 모종을 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모종 값은 해마다 오르고, 몇몇 골라놓은 모종만으로도 이미 몇 만 원이 훌쩍 넘어가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모종을 적게 심는다고 해서 수확량이 꼭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모종을 널찍하게 심으면 그만큼 덩치가 크게 자라니 자연스럽게 수확량이 늘어난다. 손바닥만 한 땅에 모종만 많이 심는다고 해서 수확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단 한 포기만 심을 때에는 모종이 뿌리를 내릴 때까지는 신경을 좀 써야 한다. 딱 한 포기 심었는데 죽어버리면 그 해 농사는 끝장이니까. “처음이 중요해. 일단 모종이 흙냄새를 맡고 나면 그때부터는 잘 안 죽거든!” 초보 농부였을 때 줄곧 듣던 말이다. “혹시 모종이 죽으면 새로 사다 심으면 되지”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농사에는 때가 있다고, 그때쯤이면 이미 농사 시기를 놓쳐버린 후다.
가지는 키가 제법 크게 자라는 작물이므로 밭 끝자락에 심었다. 그런데 모종을 심을 때 한 가지 실수를 했다. 집 앞 인삼밭을 철거할 때 얻은 파란색 차광막을 검은색 비닐 대신 깔아주었다. 차광막은 엄청 질기므로 몇 년은 사용해도 될 테고,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폐비닐 쓰레기도 줄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은 좋았는데 차광막은 내가 기대했던 기능이 전혀 없었다. 기껏 차광막을 덮어주었건만 햇빛이 투과하는지 차광막 안에서 풀이 자랐다. 어차피 풀을 뽑아 줄 거면 뭐 하러 차광막을 씌워줄까? 결국 차광막을 들추고 몇 차례 풀을 뽑아주어야 했다. 거기에다 한 술 더 떠서 비가 와도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했다. 결국 여름 내내 물을 퍼 날라야 했다. 앞으로는 텃밭에 차광막을 깔아주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역시 간격을 넓게 심어서인지 가지는 엄청난 속도로 자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가지가 내 키보다도 더 크게 자랐으니 큼직한 토란도 가지 옆에서는 작아 보였다. 파프리카 두 포기가 초라해 보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지나가던 옆집 아저씨께서 우리 집 가지를 보고 말씀하셨다. "가지가 저렇게도 크게 자라나 보네!"
가지는 성장 속도가 빠른 작물이다. 꽃이 피고 작은 가지가 열렸다 싶으면 어느새 팔뚝만큼 굵어져 있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라 십여 개가 끊임없이 자란다. 이때부터는 가지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 메뉴에 등장한다. 가지 무침, 가지 볶음, 가지 튀김, 가지찜. 그런데 매일 가지만 먹고사나? 결국 우리 식구들은 가지만 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추석 때 동생네 식구들이 왔다. “가지 좀 줄까?” 동생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우리 집에도 많아!” 예전 같으면 공짜라고 좋아했을 터인데 이제는 귀찮다는 표정이다. 가지는 초보 농사꾼의 텃밭에서도 잘 자라나 보다. 더구나 시골에는 텃밭 없는 집이 거의 없으니, 내 주위에는 가지를 준다고 해도 반가워하는 사람도 없다.
텃밭 채소는 재배도 중요하지만, 갈무리한 채소를 어떻게 보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가지를 말려도 봤다. 하지만 작년에 말려놓은 가지뿐만이 아니라 무말랭이도, 시래기도 아직 남아있다. 그나마 수확한 채소를 저온저장고에 넣어두면 좀 오래 보관이 되지만, 한 달도 채 안되어 물러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나무에 매달려있으면 좀 더 오래갈 것 같아서 수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더니만 가지가 큰 것은 40cm나 된다. 한 포기 심었는데도 이 정도이니 두 포기 심었으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식구가 별로 없으니 먹는 양이라고 해봐야 정말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도시에서 살면 비싼 채소 값에 눈이 번쩍 뜨일지 몰라도, 시골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남아도는 게 채소다. 아직까지 우리 집 텃밭에서는 올봄에 심은 고구마와 생강, 토란 등이 수확을 위해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가지도 아직까지 꽃을 피우고 있고.
시골에서는 먹고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말하며 다니는 사람 중의 하나다. 하지만 먹는 것만 놓고 따지자면 시골만큼 넉넉한 곳도 없는 것 같다.
시골의 가을은 풍요롭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가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