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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송곳 Sep 13. 2023

<잠>, 열린 결말이 배가시킨 미스터리함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어느 사이 몽롱한 잠이 주는 두려움

※영화 줄거리,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누가 들어왔어.” 


<잠>의 도입부에서 현수(이선균)가 자면서 읊조린 나지막한 한마디로, 수진(정유미)과 현수 부부의 불안은 시작된다. 잠은 의식과 무의식이 긴밀히 연결된 상태다. 수면 도중 현실 세계에서 의식적으로 인식한 일련의 사건들은 잠재된 무의식으로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누가 들어왔다’라는 현수의 발언은 그의 말대로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극본의 대사일 수도 있고, 수진의 주장대로 귀신이 현수의 몸에 들어왔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현수의 육신에) 누가 들어왔다’라는 수진의 믿음이 미칠듯한 불안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몽유병에 걸린 현수의 기이한 행동이 계속될수록 수진의 불안은 더욱 짙어진다. 현수가 잠을 자며 얼굴을 심하게 긁는 바람에 얼굴과 손이 피범벅이 되는가 하면, 오밤중 날고기와 날계란, 수돗물을 게걸스럽게 섭취하기도 하고, 급기야 창밖으로 투신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집안의 가훈답게 수진은 현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잠들기 전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금주하고, 과로하지 않으면 남편의 병은 완치되리라, 그리고 곧 평안한 일상이 찾아오리라. 그때까지 수진은 희망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1부의 마지막, 부부가 함께 키우던 강아지 후추의 죽음은 수진의 희망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 들리지 않은 후추의 울음소리와 고요해진 집에 불안해진 수진의 의심은 틀리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발견된 후추의 사체는 수진과 현수 사이 믿음의 벨트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현수가 귀신에 들렸다는 믿음이 확고해질수록, 부부간의 믿음에는 아슬아슬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2부에서 수진이 딸을 출산하고 불안은 극대화된다. 죽은 후추처럼 딸이 냉장고에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펄펄 끓는 사골국에 현수가 딸을 넣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은 수진을 불안에 떨게 한다. 수진은 자신이 잠든 와중에 예상치 못한 비극이 벌어질까 두려워 잠을 자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개 짖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 없이 너랑 단둘이 살고 싶다’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 아랫집 할아버지가 남편에게 빙의했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3부에서 부부관계는 완전히 파탄되어 불안이 절정에 달한다. 현수는 수진이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해 수진을 정신병원에 보낸다. 그러나 현수가 수진을 만나러 방문한 정신병원에는 수진이 없다. 현수가 수진을 조우한 장소는 다시 돌아온 집이다. 1부, 2부와 동일한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에는 부적들이 흉물스럽게 발 디딜 곳 없이 붙여져 있다. 수진이 정신병원을 탈출해 집에 온 이유는 해당일이 아랫집 할아버지가 사망한 지 10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100일은 귀신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천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한이다. 100일이 지나면 아랫집 할아버지의 영혼이 남편 현수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딸을 죽일 것이다. 극도의 흥분 상태인 수진은 남편에게 빙의된 할아버지의 귀신과 맞서 싸운다. 마지막 결말에서 결국 아랫집 할아버지 귀신은 현수에게 머물기를 포기하고, 천도한다. 단순하게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갖은 고생 끝에 평화를 얻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이다. 영화를 감상한 관람객 중 몇몇은 예상 가능한 결말 때문에 <잠>이 허무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잠>의 결말을 단순히 해피엔딩으로 단정지을 수 없으며, 유재선 감독이 열어놓은 결말의 확장성 덕분에 <잠>의 미스터리함이 배가되었다고 본다. <잠>의 결말은 3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결말1. 영화에서 나온 그대로 현수에게서 아랫집 할아버지의 귀신이 빠져나갔고, 수진과 현수 부부는 마침내 평화를 맞이한다.(해피엔딩)

결말2. 현수가 아랫집 할아버지에게 귀신 들린 것은 맞지만, 귀신은 끝까지 현수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현수는 수진을 안심시키려 귀신이 천도한 척 연기한 것이다. 

결말3. 현수는 귀신이 들리지 않았다. 아랫집 할아버지가 사망한 날부터 현수의 몽유병이 시작된 사건은 우연일 뿐이며, 독립적인 두 사건을 수진이 연관지어 해석한 탓에 불안이 가중되어 수진은 정신질환 환자가 되었다.      


극 중 현수의 직업이 ‘배우’라는 설정은 결말2의 타당성에 힘을 싣는다. <잠>의 마지막 신에서 아랫집 할아버지가 ‘현수의 육신에서 나가겠다’라고 말할 때, 개인적으로 그 모습이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만약 유재선 감독이 정말로 해피엔딩을 의도했더라면, 타고난 연기력을 가진 이선균 배우의 연기가 어색해 보일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애초에 현수의 직업이 배우인 설정은 결말에서 ‘현수가 귀신이 나간 척 연기할 수 있다’라고 열린 결말을 제시하려는 감독의 의도일 것이다. 또한, 결말에서 수진이 현수의 품에 안겨 나른하게 잠든 반면, 현수는 불안한 눈빛으로 눈을 뜨고 있는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결말은 <잠>의 2부에서 잠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현수, 그리고 현수가 문제를 일으킬까 두려워 잠을 자지 못하던 수진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불면’은 곧 ‘심리적 불안’을 뜻한다. 따라서 현수는 수진을 안심시키기 위해 귀신이 빠져나간 것처럼 연기해서 수진을 속였고, 이 때문에 수진에게 내재하던 불안이 현수에게로 옮겨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수의 몽유병이 발생한 시점과 아랫집 할아버지의 사망 날짜가 겹친다는 것 이외에 귀신들린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점은 결말3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아랫집 할아버지 귀신이 현수의 육신에 들어온 데는 살아생전 할아버지가 수진을 사모했을 것이란 불확실한 심증 외에 명확한 이유가 없다. <잠>은 대체적으로 남편의 몽유병 증상을 보며 겁에 질린 ‘수진’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도입부에서 현수가 읊조린 ‘누가 들어왔다’라는 대사는 현수의 말대로 그가 맡은 배역의 대사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일 수 있고, (수면클리닉 의사에 따르면) 잠든 채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는 행위도 몽유병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2부에서 수진은 현수가 딸을 쓰레기 더미에 유기하거나, 펄펄 끓는 사골국에 넣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현실이 아니라 수진의 착각이다. 급기야 수진은 딸을 껴안고 화장실 욕조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잠긴 화장실 문을 열려는 현수를 공포스럽게 느낀다. 하지만 현수가 딸을 해하려 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으며, 현수는 단지 볼일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려 했던 것뿐이다. <잠>은 전반적으로 수진이 인식하는 주관적인 불안을 조명하며 전개되므로, 모든 사건은 정신질환 환자(수진)의 관점에서 벌어진 착각일 가능성이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결말을 단정 짓는 일은 관객의 자유다. 혹은 결말을 단정 짓지 않고 다수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상상을 펼치는 것도 관객의 자유다. 무엇이 감독의 의도였건 간에 정교히 연출된 한국 미스터리 영화를 볼 수 있어 기쁠 따름이다. 1-2-3부로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연출의 정도성도 인상 깊었다. 1부에서 같은 침대에서 자던 수진, 현수 부부가 2부에서는 각방을 사용하고(부분 별거), 3부에서는 수진이 정신병원에 격리된다(완전 별거). 집 벽에 걸린 가훈(-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과 가족 사진의 유무도 정도성을 나타낸다. 영화 초반부에는 가훈과 수진, 현수, 후추 셋이서 찍은 가족사진이 벽면에 걸려있다. 그러나 후추의 사망 이후, 2부에서 수진은 가족 사진을 뗀다. 3부에서 현수가 귀신이 들렸다는 자신의 말을 신뢰하지 못할 때, 수진은 벽에서 가훈을 떼어 거울에 던진다. 가훈과 가족사진은 가족의 결속력을 의미하기에 벽에서 가훈과 가족 사진이 떨어지는 과정은 부부간 믿음이 약화되는 정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잠>은 내게 최근 상영된 한국 영화들이 주지 못했던 몰입감을 준 작품이기에, 향후 유재선 감독이 선사할 또다른 미스터리함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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