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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향 Feb 01. 2021

20대  방황하던 시절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경험도 삶의 경력이다

 

이십 대는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몰랐다. 삶이 우울했다.  남을 쫒아가는 삶을 꿈꿔왔다. 20대 청년들이 그렇듯 목표와 꿈도 없이 방황했다.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 외에는 다른 길이 있는 줄 몰랐다.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만약 내가 하고싶은 그림을 그렸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난 어린시절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시절 부모님은

나의 재능을 발견해 주지 못했다. 그렇게 내소질은 무치고 말았다.


20살에 취업을 하면서 첫 독립생활이 시작되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종종 대학을 간 친구들이 부러웠다. 직장을 다녀도 마음이 공허했다. 공부가 하고 싶어 공부의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다.


직장생활 2년 차 일 때이다. 공무원 공부가 하고 싶어 직장을 그만뒀다. 공무원 공부는 평생 직업으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학원과 집을 구해야 했다. 직장생활에서 모아놓은 여유돈이 많지 않았다. 오래된 건물이라 집이 허름했다. 옛날식 부엌과 다락방이 있는 집이다. 밤마다 다락방에 쥐소리가 들려 소름 끼치기도 했다.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집 환경이 싫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매일 공무원 학원으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수험생이 된듯한 기분이다. 학원 수업을 열성을 다해 들었다. 1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성적을 올리기는 무리였다. 문학작품, 시를 접했던 것은 좋았다. 돈만 계속 까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어는 기초가 부족해 성적을 올리기는 무리수였다. 나의 실력을 인정했다. 여기까지 라고 생각을 하고 접었다.


마음이 처참했다. 그 당시 고등학교 동창이 전화가 왔다. 역삼역 근처 괜찮은 회사가 있다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돈을 벌려는 마음에 쫒아갔다. 다단계인 줄 몰랐다.

성공해서 부모님 효도시켜 드리고 싶었다.  다단계에 빠져 단체생활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매일 출근을 했다. 부모님이 뿌리치고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두지 않았다. 무언가 빠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곳에 동창들도 눈에 띄었다. 깜짝 놀랐다.

6개월이 지났다.  이곳에서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순간 정식이 번뜩 났다.

앞으로 뭐 먹고살아야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멘토가 없었다. 청년시절은 뭐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삶에서 멘토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조차 없었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문제였다. 타인에 의해 선택할 때가 많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엄마는 간호조무사 공부를 권했다. 그 당시 엄마는 산부인과 근무를 했을 때였다. 간호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인지 고민조차 하지 못했다.

자격증 취득을 하고 3교대 병원 근무했을 때였다. 밤 근무는 밤낮이 바뀌어서 일을 해야 하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낮에 잠을 자도 밤에는 졸렸다. 생체 리듬이 깨진 것이다.

밤 9시였다.  환자를 처치하러 병동을 돌 때였다. 한층을 돌고 있는데 몸이 후끈후끈했다. 얼굴까지 열감이 느껴져서 안 되겠다 싶었다. 열을 재봤다. 40도였다. 혼자 근무라서 교대를 할 수 없었다. 아침 교대시간이 될 때까지 견딜 수밖에 없었다. 밤새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열이 펄펄 나서 날이 새기를 바라며 끙끙 앓았다.

아침이 돼서야 간호사 선생님이 와서 링거를 맞을 수 있었다.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내과에서 사진을 찍어 보았다. 결과는 결핵성 늑막염 진단이었다. 늑막염은 생소했다. 가슴 막에 물을 빼야 했다.  바늘로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통증이 찌쪄질듯했다.


엄마가 놀라 찾아왔다. 엄마는 대학병원으로 입원시켰다. 일주일 동안 가슴 막에 물을 빼야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입원해 본거라 병원은 어색했다. 건강하다고 자부했던 것이 탈이 났나 보다. 병원 기숙사 생활하면서 혼자 대충 밥을 끓여 먹곤 했다. 아프면 나만 손해구나. 퇴원하고 열 개도 넘는 약을 6개월 먹으며 완치를 받았다. 그 이후에도 숨 쉴 때마다 가슴 통증이 있었다.

정신과 병원에 입사했을 때이다. 철창으로 막아 놓은 폐쇄 병동이 보였다. 폐쇄된 병동에 있는 환자들이 안타까웠다. 정신과 약은 매일 먹어야 한다. 알코올 중독, 조현병, 조울증 등 다양한 질병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한 달 전에 입원해 있던 알코올 중독 환자가 다시 입원했다. 술이 만취해서 강아지 집에서 잠이 들어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  내 주변에는 알코올 중독이 없어 잘 알지 못했는데 무서운 병인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알코올 중독은 간 기능 저하, 기억력 문제, 가정 내 폭력, 직업상실, 불안, 우울, 심하면 환청까지 들린다. 가족까지 병들게 한다. 가족들도 정신질환을 돌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병원에 장기로 맡겨둔다.

정신과의 광경은 적응이 어려웠다. 밤이 되면 무서웠다…. CCTV로 보면 환청으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해 뒤척이는 사람도 있다. 이런 광경이 익숙하지 않았다. 정신질환에 대해 이해력이 부족했다. 조현병 여자 환자가 있었다. 내가 마음에 가는 환자였다. 동그란 얼굴에 통통한 체격을 가진 순수하고 착해 보였다. 남편이 아내를 입원시켜놓고 면회를 온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상황이 안타까웠다.

사회복지 선생님과 일주일의 한번 환자들이 함께 모여 프로그램하는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언니와 처음 만나게 된 경우였다. 친언니는 조증 환자였다. 서로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정신병동에서 자매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을까? 어떤 위로도 해주지 못하고 지켜봐 줄 수밖에 없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잠을 못 자는 환자들도 몇 명 있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존경스럽다. 내 나이 이십 대 중반 나이에 감당하기는 벅찬 일이었다.


3개월마다 다양한 과의  병원을 정착하지 못하고 옮겨 다녔다. 나도 사회생활을 잘하진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 다양한 곳에서 일을 했지만 결코 헛된 일은 아니었다. 병원마다 새로운 경험을 주는 곳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뭘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여러 병원에 옮겨 다니면서 왕따도 당해보고, 병원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쫓겨나기도 했다. 엄마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이 보기 안 좋으셨나 보다. 엄마가 일하는 곳으로 오라고 하셨다.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이었다. 이곳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옮겨 다니지 말자. 나와 비슷한 나이 때가 없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50대 선생님과 일을 하면서 배울 점도 많았다. 작은 생명이 꿈틀대는 것이 귀여웠다. 아가들을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출산 엄마들은 몸조리하러 조리원에 온다. 아기는 신생아실에 맡겨두고 엄마는 요가로 몸을 풀기도 하고 휴식을 취한다. 호텔 요리처럼 나오는 식사가 하루 세끼 나온다. 조리원 있을 때 엄마들은 편안하고 고요해 보인다.

유니세프에서 하는 모유 수유 교육을 받고 왔을 때이다. 엄마가 되어 아이를 낳으면 모유를 먹인다. 모유 수유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나도 나중에 결혼해서 출산하면 모유를 먹여야지 라는 생각도 했다. 산모들이 아기 젖 물리는 것을 도와줬다.

결혼이 늦어지면서 출산하신 산모 나이 때도 사십 대가 많다. 아가들이 모유를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미소 짓게 된다.

 “잘 먹고 있네.” “아가야 잘 먹고 쑥쑥 자라렴 “ 말을 해준다. 첫아기를 낳는 산모는 처음부터 유선이 트이지 않아서 모유가 나오지 않는다. 아기 먹는 속도와 모유량이 따라잡지 못한다. 유선이 트이고 모유가 잘 나오기 위해서는 3시간 간격으로 저장한 모유를 먹여야 한다. 15분씩 양쪽 젖을 물리도록 해야 한다. 아기가 잘 먹지 못하면 황달이 와서 입원하는 경우도 있다.


배우지 못한 열등감이 나를 괴롭혔다. 간호조무사로 일을 하면서 간호사와 비교되었다. 간호과를 가서 공부를 더 할 걸 그랬나. 이십 대를 후회하지 않기 위해 대학을 가야 하나 싶었다.

많은 직장을 옮겨 다니면서 나의 마음을 알았다. 이십 대 헤매고 다니는 과정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 많은 병원들 중에서 나와 맞는 것을 찾았으니 말이다.

자립을 일찍 하면서 방황도 했지만 독립심과 책임감을 기를 수 있었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힘이 생겼다.

20대를 즐기지 못하고 산 것이 후회스럽다. 다시 태어난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20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다시 돌아간다면 내가 하고 싶은 여행 실컷 다니며 세상 경험을 많이 쌓고 싶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틀에 박힌 나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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