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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 Mar 14. 2024

타인의 구원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

에세이

우리는 과연 타인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선 안된다고 단언하겠지만 그럼에도 아주 작은 확률로 구원이 될 가능성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우리는 타인의 구원이 될 수 없는가라고 살펴보면 첫째, 내가 그들의 구원이 되고 싶지 않을 때이다.


가끔 회사와 외부활동을 하다 보면 원치 않는 구애를 받을 경우가 있다. 그중에 제일 난감한 것은 기혼자의 구애이다. 더 최악인 것은 자녀가 다복하신 유부남들의 작업성 멘트이다.


음... 이 부분에서 내가 가장 분노하는 이유는 무책임이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결혼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결혼의 의미는 내가 배우자로 맞이하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불타는 사랑이야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또한 인생의 여정에 봄바람처럼 다가오는 사람과 상황이 있어도 자신의 역할을 지키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2주 전 일요일이었나? 자신이 불편하게 한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유부남의 카톡이 왔다. 그래서 없다고 했으나 답답하다면서 갑자기 자신이 걷고 있는 사진을 나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휴, 사진을 보고 나니  카톡이 오자마자 절레절레했지만 참으려던 마음이 화산폭발처럼 분노가 되어 터졌다. 나의 여가시간을 방해한 것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장문의 팩폭 답장을 보냈다.


알아들었는지 이제 연락하지 않겠다던 그는 6시간이 지난 저녁 8시에 답이 또 왔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는 연락이었다. 그는 6시간 동안 머릿속의 대부분이 나였나 보다. 아까운 시간이여...도리도리.


화가 나서 업무상 연락해야 하는 단톡이 있다는 말과 해야 하는 업무의 본질을 생각해 보라고 연락하니 드디어 답이 안 왔다.


과연 그의 세 자녀는 자신의 아버지란 사람이 다른 여자에게 이러는 것을 알까. 그의 아내는 알까. 대체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자신이 한 선택에서 자신이 닮고 싶은 사람이나 친구가 없다는 이유로 나의 세계를 침범해도 되는가. 그래놓고 업무에 대한 열의로 인한 카톡이라고 포장하는 그에게 조소가 났다.


정녕 과거의 자신의 선택이 청춘의 오판이라고 해도, 사랑이 아닌 외로움에 대한 선택이어도 자신이 스스로를 해방하거나 구원할 용기가 없으면 여전히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부분에선 절대 타인이 자신의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다름이 아닌 틀림의 문제이다. 오늘 선배들에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원리원칙주의자라고 평가받은 나의 세계에선 이것이 진리다.


두 번째, 아무리 착한 사람도 자신을 죽이려고 흉기로 찌른 사람을 구하려는 인간은 없다.


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께서 말했다. 내담자님의 약점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흘리듯이 보여주는 것은 어떠하냐고 사람은 다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니까 다수의 괴롭힘이 줄어들 것이라 했다.  


나는 단박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 그리고 날 지지해 주는 이들에게 나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완전히 괜찮고 편합니다. 그렇지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의 심장을 노리는 이들에게 저의 약점을 오픈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존엄의 문제니깐요."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 사람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게 빛나는 나의 한쪽 면모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전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 그 빛나는 나의 면모를 만들기까지 깊은 상처를 가진 나, 끝없는 절망에 빠졌던 나, 살고 싶지 않았던 나를 말이다. 그랬던 나의 내면아이가 죽을힘을 다해 밀어 올렸던 것이 지금의 나, 그들이 보는 빛나는 나였다.


그들이 가지고 태어난 것이나 절대적 생활조건이 나보다 부족함이 있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오직 나를 끌어내려 자신이 살고 있는 나태하면서도 편안한 그러면서도 일상에서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는 본인들의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어 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각자 자신만의 생의 경주에서 나의 삶이 정녕 그들의 삶을 짓밟았는가? 그들의 삶을 짓밟은 건 그들의 성찰 없는 생각과 욕망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영역이 훼손될까 봐 남의 선은 마구잡이로 침범하여 말살하는 내밀하고도 극한의 이기심말이다.


셋째, 시간의 속도가 달라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열을 가리자는 말이 아니지만 세상에 어떤 집단들은 자신의 시간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고 건설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을 한다.


그분들 중에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열심히 앞서 나가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항상 기억할 것은 사람다움을 지닌 분들 가운데 우리 뒤쪽에서 열심히 달리고 계신 분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앞서 간다고 해서 뒤에 오는 아름다운 이들을 나의 속도만큼 끌어올 수는 없다. 그것이야 말로 오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한 노력은 때로 필패를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우리가 타인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는 사건을 넘어 연속된 시간을 사는 존재라는 점이다.


어떤 인연은 여전히 연결된 채로 어떤 인연은 단절된 채로 살아간다. 우주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초끈이론이 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구원하려던 필사의 노력들은 분명 상대에게 흔적을 남긴다. 그럼 타인이 살아가려는 노력만큼 우리가 남겼던 기억이 그를 그가 원하는 정도만 구원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명 타인을 구할 순 없지만 여전히 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p.s. 너무 피곤했지만 써서 풀어내야 하는 마음이 있다. 이 글을 보는 독자분들도 노곤할 정도로 힘든 하루. 여러분의 마음을 따뜻한 물에 녹이듯 풀어주는 밤이 되길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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