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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 May 01. 2024

탄탈로스의 형벌에서 살아남기

손에 닿을듯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

곧 있으면 이사 준비를 해야 해서 집을 알아보다가 굉장히 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끝나고 리딩국가가 출구전략을 준비하면서 금리상승을 지속적으로 단행했다. 그전에는 코로나 19로 인하여 거의 0프로에 가까운 금리를 유지하였고 그 여파의 일종으로 아파트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서울 아파트가격은 10억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한 나는 지금의 경제상황에서 집을 매수할 것인지 조금 더 시장기조를 지켜봐야 하는지 오늘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그리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집을 샀을 경우 매달 갚아나가야 하는 원리금을 계산하고 집을 사지 않았을 경우 임대료를 비교해 보았다. 고민을 하다 하다 집을 매수한 후 그대로 임대를 줘서 임차인이 나의 대출을 상환하는 상황도 고려를 해보았다.


그러나 그 경우의 수는 전입조건에서 걸려버렸다. 그러면 지역을 옮기는 것은 어떨까 고민을 했을 때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 나는 무언가 배우고 싶을 때 쉽게 배울 수 있기 위해 대도시로 이사를 왔다. 실제로 기회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에게 시간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물론 경제란 누군가 손해를 보면 누군가는 이득을 보는 제로섬게임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보다 더 큰 위기감은 사람들의 행복이 숫자에 저당 잡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미래 한국사회의 문제로 저출산을 꼽는다. 저출산이 유지가 되면 인구절벽이 올 것이고 나라를 유지할 최소의 인구체계도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사회가 말하는 결혼적령기에 들어선 사람 중 한 명이다. 이 시기 사람들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내린다. 결혼을 하기도 하고 혼자만의 삶을 즐기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영역으로 여겨졌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현실]에 눈이 떠진 오늘 이것은 개인의 선택의 영역이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사회적 문제라는 거시적 차원의 문제가 개인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대한 불안감과 자신의 노력이 합당하게 보상받아야 한다는 욕망이 더해지면 우리는 수십 년이라는 아까운 세월을 그곳에 투입하게 된다. 그리고 수십 년이라는 세월은 나의 주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삶에 대한 더 많은 책임감을 요구하게 된다.


"너를 키우기 위해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매달 100만 원이 넘는 원리금을 상환하며, 네 교육비까지.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그 어떤 것도 다 참아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는 울분이 치솟게 된다. 그렇게 세상에 모든 사람이 적이 되어도 가장 든든한 편이 되어줘야 할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이 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비단 이미 결혼한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갈라놓을 수 있는 문제이다. 둘이 정말 사랑해도 이러한 경제상황에선 서로를 놓을 수 있다.


과거의 내가 남부럽지 않게 노력을 하고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왔다고 가정해 보자. 남들이 놀러 다닐 때도 야근을 했고 그렇게 성실히 하면 직장 내에서 승진이 되고 연봉도 오르고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만으로 버텼다.


하지만, 거시 경제의 흐름 속에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내가 야근할 때 쉬엄쉬엄하던 옆자리 직원이 부모님께서 주신 아파트가 몇십억이 되고 적절한 타이밍에 매도를 한 뒤 그 자금으로 더 큰돈을 벌고 있다면 이 직원은 회사 생활에 여전히 집중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남들보다 늦지 않게 아파트를 매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때 아파트를 무리해서 사모으던 사람이 지금의 고금리 하에 원리금상환부담에 허덕이고 있다면 하필 그때 운명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그 사람에게 같이 빚을 갚아나가자고 할 수 있을까? 월급을 받자마자 마이너스가 되는 나의 손을 잡아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높은 집값만이 사랑을 방해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나는 위에서 가정한 케이스를 여럿 관찰해 왔다. 오늘의 나도 어떤 선택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며 정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 시간의 일부는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현존하지 못할수록 우리가 바란 행복은 더 멀어지는데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받게 될 그리스로마신화의 탄탈로스의 형벌 같은 문제 아닐까 생각한다. 손에 잡힐듯한 사과가 잡히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집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원하는 집은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목이 너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데 물을 점점 줄어들어 아무리 붙잡아 모으려 해도 손사이로 다 빠져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적당한 내가 손을 벌려도 미안하지 않을 차선책이 필요해 보이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운이 좋게 사랑의 결실을 이뤄도 서로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이 넌 왜 아끼지 않고 노력하지 않느냐며 힐난이 시작된다. 남들만큼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다 합쳐지면 이 거시적인 문제도 해결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단번에 이뤄질 거란 가능성은 낮게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크고도 중요한 사랑이라는 문제가 개인의 해결과제로 각자도생을 하여 소수만이 살아남는 생존게임이 될 것만 같다.


탄탈로스가 형벌을 받은 이유는 자신에게 축복을 줄 신을 위해 자신이 가장 아껴야 할 아들을 희생하여 신들에게 바칠 음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린 욕망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어떤 식으로든 받게 되지 않을까?


사랑하기 어려운 시대다. 여전히 욕망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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