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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주 여행의 시작 -1편 미국

진짜 배움을 알게 한 나의 첫 배낭여행

6대주 : 북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내 생애 첫 자유여행지는  북아메리카 미국이었다.



  자발적 의지가 아닌 아빠가 어느 날 내게  쥐어준 항공권과 돈 덕분이었다.   


2006년 12월 16일 오전 9시에 LAX 공항에 도착했다.  아빠는 불법체류라도 좋으니 미국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아빠가 "드디어 나를 한국에서 추방시키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청주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타는 아침까지도 쉽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아빠는 "안경 잘 챙겼지?"라고 물었고 나는 내 주머니를 뒤졌다.

 "아빠, 안경 놓고 온 것 같아요.."

 그 말을 한 나도 너무 당황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브레이크 없는 도로를 질주하듯 목숨줄을 내놓고 안경을 찾아왔다.


아빠의 훈계가 듣기 싫어서 얼른 미국에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늘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았던 나였기에 내가 아빠라면 난 절대 여행을 못 보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비행기를 탔고 여행을 시작했다. 


 내 상상 미국여행화려한 거리에 하얀 피부, 노란색 머리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걷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난 열심히 읽었던 여행책 (USA 1, 2 책) 중 LA 부분을 열심히 읽으면 여행이 쉬울 줄 알았다.


기내식을 먹다가 우연히 옆좌석에 앉았던 미국남자와 결혼한 한국교포 여성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미국에 가족이 있나 봐요. 어려 이는데.." 나는 대답했다.

 "그냥 혼자 여행 가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국은 아직 자유여행 하기에 대중교통이나 여행이 잘 안 되어 있는데.. 어떻게 다니려고 그래요?"

 "그레이하운드 티켓이 있어요. 그걸로 버스 타고 다니면 돼요." 아주머니는 더 황당한 기색이었다.

 "여행 조심히 다니길 바라요. 미국은 유럽과 달라서.. 아직 여행하기 위험한데."


 여행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분이 왜 그때 내게 그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유럽여행도 해보지도 못했여행이 흔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스마트폰도 없이 시작한 여행의 시작조차  무모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듯 나는 미국 공항에 내리자마자 당황했다. 책으로는 알 수 없었던 진짜 미국공항에  도착해 보니 당장 숙소로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멍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뭐든지 나 혼자 결정해야 했다.  난 공항 한복판에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라는 걸 느꼈다.


 내가 이곳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웠다. 당장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고 코닥 스튜디오가 있는 곳까지 가야 했다.


책으로는 쉬웠지만 그때 당시 난 여행하는 방법을 몰랐다. 10달러 조차 없었던 내가 100달러를 10달러로 바꾸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내가 배워온 영어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빨리 말했다. 내가 들어오던 영어에서 2배 빨리 감기를 한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환전을 마쳤고 지하철을 탔는데 문득 서러웠다.


난 그때  LA라는 곳이 백인보다는 흑인이 많은 곳으로 생각될 만큼 많은 흑인을 봤다. 나는 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다른 현실세계를 마주하니 뭔가 두렵고 무서웠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위험한 행동임ㅜ) 그냥 서러웠다. 정신줄은 붙잡고 싶었지만 지하철 환승을 하면서 낮에도 한산한 거리가 있을 수 있구나! 하며 낯선 땅을 헤맸다.


호스텔에 도착했던 나는 따뜻한 우리나라의 난방 시스템이 아닌 카펫의 차가움을  마주해야 했다. 호스텔의 느낌은 아늑하지 않았다. 그냥 하루 묵어 하루 사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도착했다는 사실과 거주할 곳이 있다는 느낌은 날 편안하게 했다. 식빵 몇 조각 먹고 길거리로 나갔다. 모든 게 새로웠다.


나를 잘 알지 못해도 사람들은 "Hi, how are you?"라는 말을 했고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어딘가 보고 싶어 버스를 탔다. 버스 기사님은 흑인 아주머니였다.


그때 미국에서 처음으로 인상 깊은 순간이 있었다. 바로 휠체어를 탄 사람과 그 버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었다.

난 우리나라에서 단 한 번도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에 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온 리프트가 기다렸다. 운전기사는 당연하듯이 정차해서 버스를 멈췄다. 그리고 휠체어를 탄 사람은 리프트에 '쉽게'올라왔고 운전기사님의 도움을 받았다. 사람들은 5분이 가까운 시간을 당연히 기다렸다. 운전기사님은 정해진 좌석에 휠체어를 고정시켜 안전벨트를 했다. 놀랍고 신기했다. 부러웠다. 이 나라의 복지는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미국의 위대함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도  경험했다.  내가 타왔던 놀이기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영화장의 세트장을 구현한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환상적이었다. 눈앞에서 영화를 보듯 물이 쏟아지고 불이 붙었다. 실제 영화세트장에 들어왔던 그때 난  미국이 좋았다. 미지의 세계 그리고 훌륭한 기술력을 가진 나라를 여행한다는 흥분감을 가지고 다시 숙소로 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흥분을 가라앉히라며 경고하듯 미국에 온  이틀 만에  맥도널드에서 고급 카메라를 소매치기당했다.


억울했다. 나는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부주의한 사람이었기에 잃어버림에 대한 무감각함 마저 있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리니 앞으로 여행이 막막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미국 경찰서는 치안이 좋지 않았던 곳이라 폴리스 리포트를 작성해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국제전화를 걸었다.

공중전화를 안에서 나는 엉엉 울며 말했다. "나 카메라를 잃어버렸어요.." 이 말과 함께 부모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일단 기다려봐"  


다행스럽게도 해외유학 중인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 엄친아(훈남은 아니었지만)를 만났고 덕분에 La경찰서에 들러 폴리스리포트를 작성했다.


 'Stolen my camera'라는 말을 끝으로 canon 800과 함께 다시 여행이 시작됐다.


 

엄친아 오빠는 나에게 산타모니카 해변을 구경시켜 주었다. 내 심란한 마음과는 달리 산타모니카 해변은 정말 끝내줬다.  

붉고 태양이 길고 긴 수평선 아래 바다로 사라지는 모습은 할 말을 잃고 쳐다보게 하는 풍경이었다.  



그때 난 다짐했다. 이제 나 혼자이지만 20kg 배낭여행으로 내 카메라값 뽕빼겠다고. 미국 그 땅, 까짓것.. 잘근잘근 밟아주겠다고. 그리고 난 LA를 떠나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그레이하운드의 버스 풍경은 장관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외국'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정말 다양했다. 나는 내가 부모님 밑에서 보호받으며 살아온 세상에 대해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가 되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아갔다.


그렇게 우여곡절 시작된 미국여행은 스무 곳이 가까운 도시를 돌아 끝을 맺었다.


그때 아빠가 내게 준 건 돈이 아니라  독립심과 책임감이었다.


처음으로 먼 땅을 홀로 여행했기에  두려웠고  스스로 계획하고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를 온몸으로 느꼈다.  때로는 낯선 사람과 환경이 두려워  울기도 했지만  홀로 위기를 겪어나가야 한다는 것에 강해졌다.


여행을 통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사람을 만났으며 지도 속에 세상을 직접 걸었다.


 그 안에서 넓은 세상  다양한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건 내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난  계속 여행을 떠났다. 진짜 배움이 있는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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