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리비도는 구강기에서 멈춘 까닭에 사물이든 사람이든 마음에 드는 대상을 보면 본능적으로 일단 입에 넣어 보며, 입술과 이빨 그리고 혀에 닿는 감각을 통해 탐색하는 버릇이 있다.
양친의 증언에 따르면 유아기에는 공갈을 거부하며 내 엄지손가락을 그렇게 빨았다고 한다. 아동기에는 연필을 쓰면 깎아서 소모되는 흑연보다 이빨로 깨무는 뒷부분의 망가짐이 심하여 버리기 일쑤였고, 다른 필기도구들의 낭비도 심각했다고 한다. 이는 점차 사람의 어깨나 손가락, 손등, 손목, 팔뚝 등을 깨무는 일로 이어졌다고 한다.
나와 같은 사람은 주로 깨물기나 빨기와 같은 행동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인데,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흡연과 음주로 이 욕구가 대체되었지만 그렇다고 물고 빨기를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다. 리비도가 취향을 만든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여전히 사람을 만나면 그 자의 손부터 보고, 손톱의 상태로 위생관념을 유추한다. 이는 반대로 내 손톱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미치는 인상 또한 지대하리라는 생각에 유독 손톱 관리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렸을 적 유난히 흙장난을 좋아했다. 백사장처럼 바싹 마른 흙바닥에 손을 대고 비비면 손바닥이 간질간질하면서도 보송한 느낌이 좋았고, 고운 모래 한 줌을 손에 쥐면 손가락 틈으로 보슬보슬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들이 햇빛에 반사될 때마다 반짝이는 게 마치 금가루처럼 예뻐 보였다.
놀이터에서 손등에 흙을 쌓아 만들던 두꺼비집과 운동장에 선을 긋고 돌멩이를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내 영역을 점차 넓히던 땅따먹기는 방과 후 학원버스를 기다리던 나에게는 친구 없이도 단시간에 몰입하여 즐길 수 있던 놀이였다. 그렇게 한참을 홀로 놀고 있으면 경적이 울렸고, 나는 손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 학원버스에 올랐다.
학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선생님께 인사하고 곧장 화장실에 가서 손 씻기였다. 이런 습관 때문에 학원 선생님들께서는 나를 두고 예의 바르고 청결한 아이라고 평가하면서 다른 아이들 앞에서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사람들이 청결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손을 씻은 후에는 항상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더욱 단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미술학원에서 수채화를 그리는데 Waterhouse의 작품 속 여인들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선생님께서 붓을 쥔 내 작은 손을 자신의 손으로 말아 쥐고는 캔버스에 칠한 색감을 섬세하게 교정해 주셨다. 선생님의 손은 너무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때 내 시선은 정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투명했던 선생님의 손등으로부터 고드름처럼 가늘고 길었던 손가락까지 옮겨졌고, 단정하고 깨끗한 손톱에서 멈췄다.
흙장난으로 이물이 낀 내 손톱과 대조를 이루자, 내심 부끄러웠던 나머지 애써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고 구부려 수치스러운 손톱을 감추려 했었다. 이 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길게 자란 손톱은 불결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내 손톱은 항상 흰 것이 보이지 않도록 바짝 깎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주 1회씩 네일숍에서 전문가의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손톱 파일을 사용해 바짝 갈아내는 일을 시작으로 큐티클 정리를 해서 손톱 전반의 모양이 매끈하고 정갈해 보이도록 하고, 손톱의 보습을 위해서 단백질 성분의 오일을 바름으로써 손톱 관리를 마무리한다. 깔끔하게 정리된 손톱을 보고 있으면 기분도 상쾌해지고 대인관계에서 보다 적극성을 띤다. 일상에 활력을 더하는 것이다.
손톱이 짧으면 동전처럼 납작한 물건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줍기 힘든 점, 소다 캔의 팝탑 뚜껑을 따기 힘든 점, 스티커를 떼기 힘든 점, 간지러운 부위를 긁을 때 영 개운치 않은 점은 모두 예삿일이고, 남성이라면 도구 없이 오직 손가락만으로 무언가를 분해하거나 결합할 때 작은 부품을 집는 일도 어렵고 반드시 손톱이 있어야만 가능한 정교한 작업도 어렵기 때문에 불편한 점들이 있다.
반면 짧은 손톱 덕분에 매일 샴푸를 할 때 손톱이 아닌 손끝만 두피에 닿아서 부드럽게 마사지할 수 있어 좋고, 피아노나 키보드의 타건감이 섬세해지는 장점들도 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점이라면 청결한 첫인상이다. 특히 이성들과의 만남에 있어 내 짧은 손톱은 위생관념이 높은 남성으로 각인되는 장점으로 작용했고, 연애를 했던 이네들 모두 내 짧고 단정한 손톱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득적으로 배당된 직분과 사회적 역할의 담지자로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손톱은 알게 모르게 우리가 손가락으로 처리하는 많은 일들에 조연으로 참여해 도움을 준다. 없어도 살 것 같지만 막상 없으면 살기 힘든 신체 부위가 손톱이고, 각질화된 사멸세포들이 손끝에서 매일 조금씩 떠밀리는데 모순적이게도 이를 자란다고 표현하는 것도 손톱이며, 신체의 일부를 아무렇지 않게 절단하는데 고통스럽지 않고 도리어 개운함을 느끼는 부위 역시 손톱이 유일하다.
때가 되면 반드시 잘려버릴 손톱의 운명은 소멸과 결부되어 있음에도 존속하는 동안 오직 유익함만 주기에 나는 손톱이 자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고, 과거를 돌아본다. 자라난 손톱을 보면 너무나도 많은 기억이 뒤따른다. 그 기억에는 안 좋은 것들이 너무 많기에 감당 못할 상념에 빠질 것이 두려워 바쁘게 잘라낸다.
Deleuze의 손톱이 끊임없이 자라나는 사유의 메타포였다면, 나의 손톱은 매일 조금씩 죽어가며 떠밀린 상념이라 손끝에서 하얀 초승달이 떠오르려 할 때마다 이를 저지하는 것이다.
사진: Pecado
글: Peca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