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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Oct 15. 2024

<소년이 온다>를 읽고 악몽을 꾸다

 1.

작업실에서 <소년이 온다>를 3분의 2쯤 읽다가 귀가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5.18을 다룬 소설인지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면으로 다룬 소설인지는 몰랐다는 느낌을 말했다. 아내는 사람들이 그 소설을 읽다가 여러 번 울게 된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나는 감정이 많이 메마른 사람이구나, 나에겐 울만큼 슬프거나 아프다는 느낌을 줄 만한 대목이 없었는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가벼운 집안일을 마친 다음 11시 넘어까지 요즘 한창 빠져있는 펜화를 그리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2.

악몽을 꾸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자면서 뭐라고 외치는 나를 아내가 깨웠다. 아내는 꿈을 꾼 거냐고, 무슨 꿈이길래 그러냐며 진정시켰다. 왜 악몽을 꾸었을까. 악몽이 왜 하필 그날 밤에 찾아왔을까. 어제오늘 특이한 사건이 있다면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는 것. 아하, 울어야 할 대목에서 울음으로 치러야 할 감정의 작용을 결국 악몽의 형태로 치른 것이구나, 악몽이란 감정표현의 한 형식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3.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궁금했다. 소설가 아버지를 두었고 원만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을 한강 작가가 왜 폭력, 특히 국가폭력과 그로 인한 개인의 상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현재까지 내가 파악하기로는, 그것은 열 살 무렵 아버지 서재에서 본, 5.18에 관한 사진들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머리와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 그 장면들이 결국 그녀에게 문학을 하도록 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이해했다. 물론 그 나이에 그런 사진을 보았다고 해서 다 문학의 길로 가지는 않겠지. 어떤 아이는 어른 말을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범생이가 될 테고, 어떤 아이는 훌륭한 정치가가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결심할 테다. 또 어떤 아이는 힘을 기르겠다며 태권도장으로 갈지도 모른다. DNA의 작용이었을까? 한강 작가는 그 강한 충격을 문학으로 증언하고 치유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5.18은 물론 모든 역사적/정치적/사회적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다. 몇십 명이 될 수도 있고 몇만 명이 될 수도 있다. 1, 2차 세계대전 같은 세계사적 사건은 천만 단위로 넘어간다. 사망자 수는 사건의 규모나 중요성을 파악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숫자가 어떻든 사람 한 명 한 명은 누구의 아들로 누구의 친구로 또 누구의 이웃으로, 사람이면 누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다. 그가 맺은 인연, 그가 남긴 흔적, 그가 다른 사람들과 나눈 실타래 같은 감정의 갈래갈래를 어찌 사망자 몇 명이라는 수치로 퉁칠 수 있겠는가. <소년이 온다>는 우주 속에 여러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삶 속에 저마다의 거대한 우주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어리든 가난하든 부족하든 그 우주는 하나하나가 모두 고귀하다.

그렇게 보면 <소년이 온다>는 한 소년의 우주 속 티끌에 불과한 것들이 그 우주를 붕괴시키려고 한 사건을 증언한 소설이다. 소년은 비명횡사했지만 그 우주는 어머니의 가슴속에, 형의 눈빛 속에, 작가가 열 살 때 보았던 기록사진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이 소설 속에 살아있다. 그래서 '소년이 갔다'라고 말하지 않고 '소년이 온다'라고 말한 것이리라.


 5.

악몽을 꾸고 나서 새벽 일찍 일어나 나머지를 다 읽었다. 두 대목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다행히도 오늘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될 것 같다.

하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의 어머니가 아들을 회상하며 독백하는 대목이다. ‘6장: 꽃 핀 쪽으로’는 그 전체가 그 어머니의 독백인데,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울린다. 그중 한 부분이다.      


“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향긋한 노란 똥을 베 기저귀에 누었는디. 어린 짐승같이 네발로 기어댕기고 아무거나 입속에 집어넣었는디. 그러다 열이 나면 얼굴이 푸레지고, 경기를 함스로 시큼한 젖을 내 가슴에 토했는디. 어쩌끄나, 젖을 뗄 적에 너는 손톱이 종이맨이로 얇아질 때까지 엄지손가락을 빨았는디. 온나, 이리 온나, 손뼉 치는 내 앞으로 한발 두발 걸음마을 떼었는디. 웃음을 물고 일곱걸음을 걸어 나헌테 안겼는디.”     


나는 특히 이 장을 읽으며, 아무리 잘된 번역이라도 이 절절한 전라도 사투리를 옮기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예컨대 '어쩌끄나'를 나더러 영역하라면 'what shall I do'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영문판을 놓고 대조해 볼 작정이다.     

  

6.

나를 울컥하게 만든 다른 하나는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에 나오는, 소년이 형이 작가에게 당부하는 다음 문장이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평범하고 건조해 보이는 이 문장이 왜 나를 울컥하게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5.18의 진실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간, 그 소년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내가 나서서 모독한 적은 없지만, 무도한 자들이 모독하는 걸 보고서도 ‘모독할 수 없도록’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지못미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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