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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Nov 24. 2023

비혼(非婚)의 강을 건너며

*계간 <문학인> 2023년 겨울호 실린 글을 전재했음.


얼마 전 외동아들에게 슬쩍 결혼 얘기를 꺼냈더니, 자신은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비혼이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내 실존의 영역 안으로 쑥 들어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당장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평소에 살갑게 대화하는 사이가 아니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혹스러워서도 그랬지만, 따로 날을 잡아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 사안인 것 같아서였다. 요즘 청년들은 왜 결혼하지 않으려 할까? 왜 그들은 인간의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역할을 포기하려는 것일까? 이 사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옳은가? 나는 조만간 아들과 함께 비혼 문제로 대화의 멍석을 펼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파악과 이론을 통한 탐구를 병행하며 준비에 들어갔다.


비혼의 정신적 뿌리는 자유주의적 자유관


나는 먼저 현상 파악에 나섰다. 검색해 보니 2018년 12월 <SBS 스페셜-결혼은 사양할게요>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처음 50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는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가 발표된 것이 2018년 11월이었는데, 바로 그다음 달에 이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비혼 문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청년들은 이렇게 말한다. “(결혼하면) 배우자로서의 역할, 며느리로서의 역할, 무슨 역할 무슨 역할 무슨 역할... 내가 원하지 않은 수많은 역할들이 갑자기 생겨나고...” “결혼은 표준화? 그런 느낌이 들어요. 공장이 있고 컨베이어벨트가 있는데 그 안에서 거쳐야 하는 공정이 있고 (결혼이) 그중에 하나라는 느낌이 들어요.”


이 프로그램에는 비혼을 주장하는 딸과 결혼을 강권하는 아버지가 대화하는 장면도 나온다. 아버지는 “결혼하면 떠나는 게 아니라 가족을 만들어서 자식을 만들어주고 손자를 만들어주니까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거지, 가족을.”이라고 주장하고, 딸은 “나는 아빠 행복하게 해 주려고 결혼하는 게 아닌데”라고 반박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비혼을 지지하는 청년들의 견해를 요약하면, 결혼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역할을 인정할 수 없기에 결혼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얘기다. 결혼을 강권하는 아버지의 견해는, 다소 거칠고 강압적인 말투를 다듬어 진의를 살려 해석해 보면, 누구나 개인이기 이전에 가족의 구성원이므로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참여해야 하고 그러려면 결혼을 해서 행복이라는 공동선을 함께 실현해 가야 할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러한 대립구도는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이 설정한 ‘자유주의적 자유’ 대 ‘공화주의적 자유’의 대립구도와 절묘하게 닮았다. 샌델은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에서 미국 역사를 이 두 가지 자유의 대립양상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샌델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적 자유’와 ‘공화주의적 자유’는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이루는 두 개의 기둥인 셈이다.


샌델에 따르면 미국 민주주의 역사 초기에는 공화주의적 자유관이 우세했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를 넘어가는 시기에 두 가지 자유관이 치열하게 경쟁하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자유주의적 자유관이 승리한 다음 지금껏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 민주주의 역사는 자유주의적 자유관이 공화주의적 자유관을 밀어내는 과정이었다.



자유주의 이론에서 자유는 개인이 자기 가치관과 목적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이 중심이며, 공화주의 이론에서 자유는 시민의 자치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는 발상이 중심이 된다. 자유주의적 자유관에 따르면 자유는 자신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하는 개인의 역량에 달렸다. 반면 공화주의적 자유관에 따르면, 좋은 삶의 실현이 중요하며 좋은 삶을 위해선 동료 시민들과 함께 공동선을 생각하고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자치(自治) 의식이 필요하다. 자유는 자치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가치 또는 감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적인 일에 대한 지식,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전체를 생각하는 관심, 도덕적 유대감 등의 역량이 필요하다.


알고 보니 청년들의 비혼 의사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무엇보다 그들의 자유주의적 자유관이었다. 이 자유관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관계와 문화를 강요하는 기존의 결혼제도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자유관은 공동선을 중시하는 기성세대의 공화주의적 자유관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중이다. 자유주의적 자유관을 가진 아들의 비혼 의사 표명으로 공화주의적 자유관을 가진 내가 당혹스러워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의 역사에서처럼 우리의 결혼 현상에서도 과연 두 자유관이 대립하다가 끝내 공화주의적 자유관이 자유주의적 자유관에 무릎을 꿇는 일이 벌어지게 될까? 참고로 샌델은 자유주의적 자유가 팽배한 20세기 후반 이후의 미국 사회를, 박탈감·불안감·상실감·위축감이 일상화한 사회로 평가한다. 따라서 미국 정치는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 다시 말해 공화주의적 가치를 오늘날에 적합하게 되살려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비혼의 생물학적 근거는 밈 이론


다음으로 나는 짝짓기에 관한 진화론의 해석에 주목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기계라고 했다. 유전자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즉 생존과 번식을 통해 자신의 전파와 확산에만 몰두하고, 인간은 그 유전자의 의도가 성사되도록 돕는 하수인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지고 비혼자나 비출산 및 무자녀 부부가 늘어나고 있을까? 기존 진화론에 따라 인간이 유전자의 충직한 하수인이 되려면, 유전자라는 주인님의 지엄한 명령을 받들어 왕성한 짝짓기를 통해 마구마구 2세를 낳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대개 교육비와 보육비 등 경제적 여건이나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인한 돌봄의 어려움이 그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사회학적인 해명이고, 진화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 등 기존의 진화론에서는 이에 대해 변변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는 눈치다. 인간이 ‘유전자의 폭정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해명이다.     


유전자의 폭정에 저항한다고? 언제는 인간을 유전자의 하수인이라며 나약하고 비굴한 존재로 폄하하더니, 이제 와서 그 폭정에 저항할 만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한껏 띄워주니 당황스럽다. 인류 역사에서 노예나 검투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으나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해서 그런지, 해명으로서 왠지 궁색하다.


인간의 이타성 문제도 그렇다. 이 책에 따르면 기존 진화론에서는 인간의 이타성을 근연도(近緣度·Degree of relatedness: 두 사람의 혈연자가 한 개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확률), 상호적 이타성, 수렵채집 시대의 잔재, 유전자의 실수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물론 여기서도 유전자의 ‘폭정에 대한 저항’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궁색한 해명으로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45년 간 이국에서 빈민과 병자와 고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테레사 수녀의 헌신이 수렵채취 시대의 잔재였다는 말일까?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분신한 갓 스무 살 청년 전태일의 희생이 유전자의 실수였다는 말일까? 마땅한 논거가 없어서 해명이 어설퍼졌다는 의심이 든다.    


비혼·비출산 문제에 대해서든 이타성 문제에 대해서든, 그 이유가 ‘밈(meme)의 전파’라고 명쾌하게 답할 수 있다는 것이 『밈』의 저자 수전 블랙모어(Susan Blackmore)의 입장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남기겠다는 의도로 섹스하지 않는다. 섹스라는 행위, 그 즐거움, 그에 관한 마케팅을 원래의 번식 기능과 대체로 분리시켰다. (...) 섹스는 밈의 전파 수단이다.” 섹스와 번식기능을 동일하게 바라본 기존의 진화론과는 완전히 다른 놀라운 해석이다.        



‘밈’이란 단어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존의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일종의 화두를 던지는 의미로 할애한 하나의 장(11장)에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복제자(제1의 복제자)인 유전자 말고도 문화를 창조하는 또 하나의 복제자가 있다는 일종을 가설을 세우고, 그 제2의 복제자를 ‘밈’이라고 명명했던 데에서 유래한다. 밈 개념은  『이기적 유전자』가 발표된 1976년 이래 활발히 논의되지 못하다가, 심리학 기반의 과학 저술가 블랙모어에 의해 1999년에야 비로소 The Meme Machine이라는 이름의 저서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는 2010년 『밈』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밈은 아직 학술적으로 정립된 개념이 아니고 ‘밈학’은 아직 미완성의 영역이라서, 그 정의도 다양하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한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한다”라고 했고,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문화의 구성 요소로서, 가령 모방과 같은 비유전적 방법을 통해 전달된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나와 있으며, 블랙모어의 『밈』에서는 “어떤 행동 수행에 관한 지침으로서, 뇌에 저장되어 있으며 모방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라고 보다 정교하게 정의되어 있다. 『밈』의 부제인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도 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밈에 관한 어떤 정의든 핵심은 “뇌에서 모방에 의해 전달된다”라는 점이며, 이는 제1의 복제자인 유전자가 “세포에서 생식에 의해 전달된다”라는 점에서 다르다. 디지털 미디어에서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짤’(또는 ‘짤방’)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블랙모어에 따르면 단어, 개념, 이야기, 정보, 지침, 기술, 습관, 행동, 놀이, 노래, 규칙 등 모방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요소는 모두 밈이다.

  

밈 이론은 기존의 진화론이 난감해하거나 머뭇거리는 많은 문제를 단칼에 처리해 준다. 앞에서 비혼·비출산 및 이타성 문제를 언급했거니와, 인터넷 미디어의 등장과 확산의 이유도 밈의 관점에서 보면 명쾌하게 해명된다.

수직적 전달만 가능한 유전자와는 달리, 밈은 수평적·사선적 전달이 가능한 복제자다. 즉 유전자가 자식에게만 전달되는 복제자라면 밈은 자식은 물론 친구, 동료, 선후배 등 지인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는 복제자라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심지어 부모나 조부모를 향한 상향식 전달도 가능하다. 전달 수단이 생식이 아니라 모방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유사 이래 밈은 책, 전화, 편지, 라디오, TV 등 다양한 아날로그 복제 도구들의 탄생 조건이 되어 왔으며,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의 대중화를 불러왔고 이를 통해 SNS 등 다양한 미디어의 폭증을 가능케 했다. 인터넷 미디어는 우수한 복제의 조건인 충실도, 다산성, 긴 수명을 훌륭하게 충족시키는 복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터넷 미디어의 폭증은 밈의 수평적 전달을 확산시켜 수직적 전달을 능가하는 현상을 불러왔다고 블랙모어는 『밈』에서 설명한다. 그 결과 진화의 생물학적 이득을 약화시켜 결혼 및 출산 거부, 입양 등 결혼제도의 대변혁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블랙모어는 이 현상에 대해, “밈의 진화속도는 인간의 유전적 진화보다 훨씬 빠르다. 유전자는 밈을 따라잡지 못한다”라고 전제하면서, “성은 이미 밈에 장악되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오호통재라. 아들의 비혼 의사에 담긴 생물학적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낙담하기는 이르다. 아들은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했지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비로서 아들의 밈보다 나의 지분도 1/2이 들어있는 그의 유전자를 응원한다. 그래서 그가 문화적 복제자인 밈을 전파하거나 공유하는 일보다 생물학적 복제자인 유전자를 전파하거나 공유하는 일에 더 몰두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와 아내가 부부로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와 관련된 밈들을 퍼뜨려서 아들이 이들을 모방할 수 있도록 선택압을 행사하는 일이다. 밈 이론으로 유추하건대, 그것이야말로 아들이 비혼 의사를 거두어들이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제1의 복제자인 유전자의 전파를 유도하기 위해 제2의 복제자인 밈을 전파해야 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블랙모어는 유전자와 밈의 경쟁에 주목하면서도, 유전자와 밈의 상호작용을 통한 공진화(co-evolution)도 강조했다. 그러니 나의 방법은 분명 『밈』의 논지와도 잘 부합하리라 확신한다.   


비출산의 강은 또 어떻게 건널까


이렇듯 나는 나름대로 비혼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아들과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를 엿보았다. 주중이면 대개 늦게 들어오고 주말이면 흔히 늦잠을 자거나 외출하는 녀석의 일정도 일정이지만, 그 문제를 새삼 꺼내기가 왠지 쑥스러운 탓에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식사 자리에서 놀랍게도 비혼 의사 파기 선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저 결혼하게 될 것 같아요” 그동안 나의 노력에 하늘이 감응한 것일까, 당연히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하기도 했다. 그래, 고맙다. 잘 생각했다. 나는 녀석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 빛나는 선택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과제가 남았다. 이제 비혼의 강은 건너게 되겠지만 비출산의 강은 또 어떻게 건널 것인가? 앞으로 아들 부부가 결정할 문제라고 이를 외면하기에는, 나와 내 조상의 아름다운 흔적이 담긴 유전자와 인류의 오랜 지혜가 담긴 공화주의적 자유관이 너무도 소중하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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