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벼르던 화장대를 정리했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도 여기저기 묵혀져 있던 제품들이 꽤 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대용량 바디로션, 선물 받아서 쓰다가 1/3쯤 남은 핸드크림, 제형이 너무 뻑뻑해서 고스란히 남아버린 크림 한 통, 아이 리무버와 네일 리무버, 손이 안 가는 립스틱 등등. 거의 다 써가는 방향제와 아이가 갖고 놀던 '액체 괴물'도 힘께 비우기로 했다. (최근에서야 액체 괴물이 프탈레이트 덩어리인 줄 알게 됐다.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그런데 화장품, 어떻게 버려야 할까? 내용물을 하수로 배출하려니 수질 오염이 걱정되고, 플라스틱 용기까지 몽땅 종량제 쓰레기로 버리려니 소각 시 공기오염을 피할 수 없다. 딜레마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럴 때 참고할 수 있는 '내 손안의 분리배출' 앱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다.
Q&A 코너에 유통기한 지난 기초화장품과 향수 배출에 대한 문의가 있어 들어가보니 '한국폐기물협회'에서 올린 답변이 있어 침고하기로 하였다.
'분리배출 앱'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화장품과 향수는 하수로 배출하거나 휴지 등에 흡수시켜 배출하고 용기는 재활용으로 배출하시면 됩니다. 다만, 고농도 화장품이나 향수는 하수처리 부하를 높이기 때문에 양이 많은 경우는 종량제 봉투로 배출하여 주시고, 소량인 경우는 내용물을 비우고 용기의 재질에 맞게 배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내 손 안의 분리배출 앱)
소량인 경우 내용물을 비운 후 용기는 따로 버리고, 고농도나 다량인 경우 종량제로 배출하라는 이야기로 해석되었다. 이번 배출의 경우, 거의 쓰던 것들이고 재활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 용기까지 몽땅 종량제로 비우는 것 또한 찜찜하여 결국 내용물은 하수로 흘려보내기로 했다.
비우기 쉬운 액체류부터 시작했다. 리무버를 변기로 흘려보내니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수질 오염의 주범이 된 양 죄책감이 들었다. 튜브형인 바디로션과 핸드크림은 쭉쭉 짜서 버렸다. 하이라이트는 크림과 립스틱이었다. 크림을 스푼으로 퍼서 버리다가 손에 잔뜩 묻고 말았는데, 몇 번이나 씻어도 끈적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얼굴에 펴 바르는 용도로 나온 화장품인데, 이제는 마치 독극물처럼 여겨졌다. 립스틱의 경우 일일이 면봉으로 파내서 버려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양손이 벌건 오렌지 빛깔로 물들고 말았다. (요령 없이 덤비다가는 이렇게 되고 만다. 립스틱을 얼려두었다가 립스틱 부분을 휴지로 잡고 빼내면 비교적 잘 분리된다고 한다.)
내용물을 다 버리고 나자 화장실은 역한 향료 냄새로 가득 찼고, 플라스틱 잔해들이 잔뜩 남았다. 용기에 붙은 스티커가 잘 떨어지면 그나마 감사했고, 물에 불렸다 수세미로 떼어내어야 하는 경우에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렇게 화장품들을 정리하고 나서 드러누워 버렸다. 속이 메슥거리고 아무런 의욕이 없어졌다.
오늘 버린 것들 중 절반은 선물 받은 것들이다. 제형이나 냄새가 맞지 않는 경우 손이 덜 가게 되고, 오늘처럼 얼굴 대신 하수구로 비워지는 일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요즘엔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 쓰는 이들도 있고, 공병에 리필을 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화장품은 자기 피부 상태에 맞게 직접 고르는 것이 그나마 덜 버리는 길인 것 같다.
시어머니, 동서, 올케에게 주름개선 크림 같은 것을 선물하곤 했던 나였는데, 올해 추석엔 화장품은 선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스친다. 버려지지 않을 것, 포장재가 플라스틱이 아닐 것... 올해 추석엔 그 무엇으로 마음을 나누어야 할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