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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Sep 21. 2022

정을 많이 주지는 않을 거야

10년 이상 연락이 없던 친구는 6개월 전 늦은 저녁에 느닷없이 내게 전화했다. 그는 엊그제 만난 것처럼 스스럼없이 자기 이야기를 토해냈다.


“ 내가 고시원 하나 인수했어. 리모델링 다했고. 방은 30개가 넘어. 이제 돈을 쓸어 담기만하면 되는데.”


고시원은 인가조건이 까다로워 신규로 진입하기 힘들다. 자본의 고도화로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진다. 주거난민은 증가할거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 여건이 힘들어져 고시원들이 싼 값으로 나와 있다. 흥정만 잘하면 좋은 조건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친구의 고민은 고시원 운영이 6개월 연속 적자라는 사실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 내가 나이 오십을 넘어 처음으로 자영업을 하는 거잖아. 얼마나 신중에 신중을 기했겠어. 고시원을 인수하기 전에 한 달을 지켜봤어. 리모델링할 때도 매일 나와서 일손을 도왔어. 고시원 거주민들이 불안해 할까봐 음료수 들고 일일이 인사했지. 매일 출근해서 라면 채우고. 밥해놓고. 반찬만 사다가 드시라고. 이런 건 힘들어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어제 저녁 늦게 전화가 왔어. “방에서 구더기가 나왔어요. 옆방 최 씨 아저씨가 삼 일째 기척이 없어요. 전화 좀 해봐요. 무서워서 잠이 안와요” 이러는 거야.”


고시원 거주민 최 씨는 노래방을 운영하다 1년 전 망해서 고시원에 들어왔다. 그는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며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보였다. 남들이 다 누리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마저 기대하지 않았다. 3개월 전부터 최 씨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고시원 안에선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으므로 고시원 옥상이나 골목길 후미진 곳 또는 편의점 의자에서 술을 마셨다. 얼굴은 부스스했고 같은 옷을 며칠씩 입고 있었다. 스쳐갈 땐 시큼한 냄새가 났다.


전화를 받지 않는 최 씨의 무응답은 친구를 불안 속으로 거칠게 몰아 붙였다. 친구는 최 씨 방문을 간절하게 두드렸고 마침내 응답이 있었다. “잠을 못 이뤄 수면제 먹고 자는데 한 밤중에 무슨 일이세요?”


다음 날 친구는 누수를 핑계로 최 씨한테 방문을 열게 하고 안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분명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저장강박증이 있을 거야. 산더미 같이 쓰레기들이 쌓여 있겠지.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제대로 치우지도 않았을 거고. 악취는 당연할거고.’ 친구의 머릿속엔 최악의 상상들로 가득 찼다. 최 씨의 방은 깔끔했다. 옷가지나 침구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세면대 주위 물기마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뽀송뽀송한 수건은 각 잡혀 걸려 있었다.


전화하기엔 너무 늦은 밤. 무례한 전화가 왔다. 친구의 목소리는 이미 술에 절어 있었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목소리, 똑같은 추임새의 반복, 듣는 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성급함. “내가 자살예방센터에 전화해봤어. 아니 나 말고 최 씨 땜에. 사업실패에 따른 정신적 충격이나 자책감, 이런 것들 녹여낼 방법이 있는 지 알아보려고. 말벗해 주래. 외롭지 않게. 하지만 정을 많이 주지는 않을 거야. 두 번 실망하면 진짜 힘들잖아.” 목소리가 가뭇없이 멀어졌다. 전화를 끊으려할 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혼잣말이 들렸다. “나도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질 수가 없어. 이제 누군가가 내 짐을 덜어주기 바래.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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