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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Sep 21. 2022

한 평생 한 여자만 사랑했다

“너희 아버지는 한 평생 한 여자만 사랑했다. 70여년을 같이 산 나는 그 여자가 아니다. 이름은 모르고 최 씨였다. 막내 가졌을 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 1주기 제사 후 음복을 하면서 엄마는 남 애기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쇠락해진 선비집안에서 태어났지. 최 씨는 아버지와 한 동네 친구였고. 최 씨는 중인 집안이었고 그 지역에서 이름께나 날리는 부자였지. 너희 아버지 집안은 비록 쇠락했지만 최 씨가 중인이라서 싫었지. 최 씨 집안에선 몰락한 선비 주제에 가타부타하는 너희 아버지 집안이 우스웠고.” 구순이 넘으신 엄마는 잔에 있던 제주(祭酒)를 다 드시고도 모자란 듯 퇴주잔에 있던 청주까지 비웠다. 보름달이 창 너머로 창백했다.


“니들 아버지는 최 씨와 혼인하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책 읽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책상물림이 무슨 재주로 돈을 벌 수 있겠어. 최 씨한테 서찰 한통만 남기고 탄광에 돈 벌러 떠났지. 그나마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니까 경리로 취직시켜주더래. 3년 동안 개같이 벌어 돈다발을 들고 최 씨를 찾았어. 최 씨는 이미 다른 집에 시집가고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였대. 남산만큼 부른 배를 본 너희 아버진 대성통곡을 하며 돌아섰다더라.” 엄마의 입술은 메말랐고 새 털같이 가벼운 한 줌 이야기는 무거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나는 처음으로 누나를 만났다. 만나자는 요청은 신중하고 무거웠다. “아버지가 보낸  서찰은 어머니한테 전달되지 않았어요. 최 씨 집안에서 미리 단속을 해둔거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징용가신 줄 알았어요. 연락도 없이 떠난 아버지를 원망할 틈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몰랐지만 어머닌 임신한 상태였거든요. 아이를 지키기 위해선 서둘러 혼인을 했어야 했어요. 배가 불러 들키기 전에. 3년 지나 돌아온 아버지가 임신한 어머니를 보고 통곡을 하셨지요. 그 때 임심한 아이는 둘째예요. 살아남은 첫째가 저예요. 당신의 누나이기도 하고.”


대성통곡을 하며 돌아선 아버지는 청춘에도 등 돌렸다. 시소의 한 쪽 끝에 최 씨를 올려놓고 더 없이 그리워했다. 그리움은 소멸하거나 흩어지지 않았다. 불가해한 형상으로 다가왔다. 아슬하게 얹혀져 있던 숨이 멎었다. 비로소 그리움의 무게는 휘발되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최 씨는 먹을 수도 잠잘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 밤새워 오래오래 울어야했다. 아버지가 그녀의 인생에서 덧없이 빠져 나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불안하게 서성이던 그녀는 아버지가 임종하기 1주일 전에 나타났고 오래도록 따뜻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낮달이 창 너머로 흔들렸다.


후기: 아버지 임종 후 그녀는 곡기를 끊었지만 그녀의 딸, 나의 누나는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극진한 간호 덕에 백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 제사 1주기에 맑고 향기로운 청주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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