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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Sep 2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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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나덕주. 대학원생 딸과 대학생 아들, 그리고 토끼 같은 부인과 한 솥밥을 먹고 있다. 내 생일이벤트로 가족여행을 제안했다. “ 모처럼 다 모였네. 이번 아빠 생일엔 동해안으로 가족여행가자. 각자 일정이 있을 테니 짧게 다녀오기로 하고. 여행경비는 엄마가 생일 선물 대신 지불하는 걸로 하고. 귀하신 따님과 아드님은 별도로 지정해주는 선물을 준비하는 것으로 하자. 오케이?” 가족이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얼굴 맞대고 놀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가족주의니 권위주의적 강압이니 이러저러한 뒷 말이 있겠지만 강행키로 했다. 나의 세대에서 소중히 여기던 관습이나 문화를 가끔 따라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리 어긋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난 나덕주 씨의 토끼 같은 부인이다. 나덕주 씨가 갈수록 대담해진다. 가끔이기는 하지만 다 결정해놓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은 질색이다. 당신 생일이니까 나름 만용을 부린 것 같은데... 밖에 나가선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간제법이 있다. 채용 후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다. 고용주들이 이 조항을 피해 갈려고 2~3개월 단위로 계약서를 쓴다고 한다. 너무 치졸해서 믿기지가 않는다. 차라리 결혼생활에 기간제법을 적용하면 어떨까? 기간은 한 10년 정도로만 정하고. 10년마다 결혼생활을 지속할지 결정하는 거다. 구질구질하게 이러저러한 이혼사유 갖다 붙이지 말고. 말도 안하면서 평생을 억지로 사는 것보단 낫지 않나? 내가 그러냐고? 아니. 절대 아니고. 남들이 걱정되어서...


난 나덕주 씨의 귀하신 따님이다. 아빠 생일날 동해안 놀러 가게 돼서 너무 기쁘다. 아빠의 통보방식이 충격적이어서 경악했지만 아주 가끔 그러시니까 문제 삼지는 않았다. 부모는 자식을 모른다. 머리 굵어지면 부모랑 여행 가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안다. 잔소리하면서 키운 것이 미안해서 그런가? 심지어 자식을 어려워한다. 자식들은 이점을 십분 활용해서 자유를 만끽하곤 한다. 자식 얼굴 표정에 따라 부모의 태도는 차이가 있다. 무뚝뚝하거나 다소 화난 표정을 지으면 부모의 간섭, 제약, 잔소리로부터 완전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난 항상 좋은 낯빛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대학원 다니며 학자금에 용돈까지 손 벌려야 하는 신세인데 얼굴까지 울상이면 쫓겨나지 않겠는가? 이런 처지에 동해안을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다녀올 수 있는데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그동안 논문 준비하느라 난 너무 찌들었다. 신선한 동해안 공기가 필요하다.


난 나덕주 씨의 귀하신 아드님이다. 아빠는 날 귀하게 대하지 않는다. 부를 때만 ‘귀하신 아드님’이라고 부른다. 이번 가족여행도 그렇다. 말이 되는가? 내 의견이나 일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아빠가 대학생 땐 독재타도를 외쳤다는 데 의견수렴절차조차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허당이다. 게다가 아빤 변덕쟁이다. 전부터 생신날 뮤지컬 보자고 하시더니. 제일 싼 자리가 십만원 가까이 한다니까 돈이 아까운거다. 심지어 아빤 권력도 없다. 내가 초등학교 때 아빠는 게임은 절대 안된다고 하셨다. 엄마가 두 시간 책 읽고 한 시간 게임하면 괜찮지 않냐고 하자마자 아빤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바로 승낙하셨다. 이번 가족여행도 엄마생각일 것이다. 동해안까진 차타고 3시간 가까이 가야 한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휴게실마다 내려서 화장실 다녀오라고 할거고. 완전 삶의 밑바닥이다. 난 납작 엎드려 기어 다니며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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