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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진 Feb 14. 2022

'실패리포트'를 시작하다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워야만 그것이 실패로 남지 않는다.



  그간 마음잡고 글을 써보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일정 주기마다 돌아오는 계절, 혹은 열병처럼 한 번씩 ‘내가 이대로 글 안 쓰고 시간을 허비해도 괜찮은가’와 같은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잠깐만 생각해도 내가 기록하지 않고 지나온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곧바로 모니터 앞에 앉아, 머릿속 장면들을 하나씩 더듬다 보면,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입꼬리에 웃음을 머금을 정도로 재밌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같이 시시하게만 여겨져 어떤 것도 쓸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 했던가. 별다른 수 없었다. 그저 모니터 앞 의자에서 일어나 언제 조바심을 느끼고 의지를 불태웠냐는 듯 일상을 살아가는 수밖에. 마치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누군가 시킨 치킨 앞에서 아무에게도 나의 다짐을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닭다리를 뜯는 것과 비슷했다.


  재작년, 나는 강원도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동시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기대할 일이 어찌나 없었던지 식사가 끝난 후에 디저트를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 하루에 가장 큰 이벤트로 여겨질 정도였다. 매일 붓기로 얼굴이 푸석했고, 그 와중에도 새로 생긴 카페가 없나 하고 검색창을 어슬렁거렸다. 어김없이, 조바심이 찾아왔다.


  - 나, 동해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볼까?

  - 어떤 거?

  - 30대 미혼 여성이 지방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는 이야기.

  - 그냥, 그동안 했던 일들 쓰면 안 돼?

  - 뭐, 어떤 거?

  - 많이 했잖아. 엄청나게.


  그런 게 재미가 있을까, 하고 대답하려다 왠지 못난 대답같아 관뒀다. 친구가 카톡창 너머에서 ‘이렇게 쉬운 것도 모르는 바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연도별로 내가 했던 일들을 대강 나열해보았다. 과연 많기는 했다. 거주지, 공부하는 분야, 아르바이트, 직업에 이르기까지 내 삶의 모습은 변화무쌍하다고 할 정도로 무수히 바뀌어 왔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불안정한 업계 자체의 영향도 있었고, 또 지루하고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면 어떻게든 벗어던지고 나가야만 하는 나의 기질적 특성도 한몫 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좀 부끄러웠다. 뭔가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의 기나긴 변명이 될 것만 같고, 어떻든 그만두고 나온 쪽에서는 방어적으로 진술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나쁜 경우 뒷담화, 아무리 좋게 봐줘도 합리화 정도로 끝날 이야기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다 예대에 다닐 때 <연출실기> 수업에서 썼던 ‘실패리포트’를 떠올렸다. 그 수업은 연극 연출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각자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 와 순서대로 발표하고, 합평하는 수업이었다.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기말고사 때까지 장면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도 좋고, 혹은 ‘실패리포트’를 써도 됩니다.” 장면을 만들며 내가 부족했던 지점에 대해 되짚어보는 과제였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설마, 내가 그 리포트를 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학기가 끝날 때까지 반 전체에서 그 리포트를 써온 건 내가 유일했다. 


  나는 그것을 모자란 내 역량에 희생된 배우들에 대한 최소한의 사과라 생각하며 썼다. -그 수업에서 발표한 장면에 대해서는 훗날 쓸 일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교수님은 내가 써 온 ‘실패리포트’를 크게 칭찬하셨다.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워야만 그 일이 실패로 남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시며. 수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남아있는 말이다.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워야만 그 일이 실패로 남지 않는다. 어디에서든 의미 찾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진심으로 ‘실패’라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렇기때문에 그토록 많은 일들을 별다른 가책없이 그만둘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내 모습은 다 허상이고, 내가 숨기고자 하는 내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편협하고 찌질한 ‘나’라는 인간을 낱낱이 들여다봐야 하는 아주 수치스러운 작업이다. 나는 이제 그 작업을 제대로 해보려고 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수치스러워하는 부분에 대해 눈 딱 감고 썼을 때 읽는 이들의 반응이 훨씬 좋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연재하게 될 ‘실패리포트’는 묻어두고 싶었던 내 흑역사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그러나, 쓰지 않고 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패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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