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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진 Feb 14. 2022

스무 살의 이중생활 上

2010년 봄에서 여름, 날카로운 주점 알바의 추억


  스무살의 여름을 잊을 수가 없다. 비가 유난히 많이 왔고, 모든 게 디지털화 되던 시기에 조그만 스튜디오에 모여 LP판과 턴테이블을 이용해 방송하는 법을 배웠다. 당시 나는 서울 모 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신입생으로, 학교 방송국 앵커가 되어 2학기 방송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한 학기동안 선배들의 방송을 참관한 후, 본격적으로 방송에 투입되기위한 이 교육은 연중 가장 길고 중요한 과정이었으며, 일명 ‘통합’이라고 불렀다. 


  여름방학 내내,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우리 기수가 준비한 원고로 모의 방송을 한 후 선배들의 피드백을 듣는 방식이었다. 좋게 말해 피드백이지, 거의 공격에 가깝기는 했지만. 교육이 끝난 후에는 다음 교육을 위한 원고를 쓰고 음악을 선곡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알바를 가야했다.


  일단, 내가 왜 알바를 하게되었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좋지 않은 형편에 서울에서 매번 부모님 돈을 받아 생활하는 게 죄송스러웠다. 아니, 너무 교과서적인 진술이다. 더 솔직해져야겠다. 인천 할머니 집에서 통학을 했으므로 사실 생활비가 크게 들 것은 없었다. 나는 놀고 싶었다. 대충도 아니고, 제대로 놀고 싶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해 변변한 옷 하나 없이 서울에 떨어졌으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쪼그라드는 기분이었겠는가. 남들만큼은 하고싶었다. 옷도 사 입고, 화장도 하고, 술도 마시고, 클럽도 가고 싶었다. 스무살이니까. 연신내 부근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나서 인천 구월동 주점에서 알바를 하겠다는 괴물같은 스케쥴을 짜놓고도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스무살이 못할 게 어디 있는가.


  “학교다니면서 할 수 있겠어요?”

  “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여럿 봤는데, 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

  “진짜 열심히 할게요.”

  “그래요. 열심히 하겠다니까, 믿어봐야지.”


  믿어봐야지, 라고 말은 하면서도 나를 꿰뚫는 것만 같았던 그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면접을 통과했다. 지금도 ‘여장부’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 사장님이 떠오른다. 50대 후반 정도의 나이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 짧은 커트머리. 커다란 목소리와 직설적인 화법때문에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어떤 사장님보다도 알바생들을 살뜰히 챙기셨다. 


  알바생들이 본인 딸보다도 어렸기 때문인지 웬만한 실수에는 눈 감아 주셨고, 신메뉴가 들어오면 레시피를 한 두 가지씩 바꾸셔서-실제로 매번 본사 레시피보다 맛있었다.- 시식으로 가장한 술자리를 만들어주셨다. 당연히 술은 무제한 공짜였다. 카운터 위에는 서빙하면서 먹으라고 올려둔 피자며 간식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한 번은 누가 가져왔다며 참돔 한 마리를 통째로 회 쳐주신 적도 있었다. 시급받는 알바생에게 먹는 것 이외에 별다른 복지가 무엇이 있겠는가. 사장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잘 먹이는 게 장땡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중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 7시쯤 일어나 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9시부터 교육을 받은 후 늦은 오후 다시 인천행 광역버스에 올랐다.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주점으로 출근하여 서빙을 하고, 때때로 알바생들과 술도 마시고, 또 옷만 갈아입고 학교가는 버스를 탔다. 정확히 시간이 어떻게 나뉘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온전히 잘 수 있는 시간이 광역버스를 타고 있는 네 시간 뿐이었다는 것이다. 하루에 네 시간, 것도 버스에서 자는 게 전부인 생활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스무살이 못할 게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스무살이었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면접 때 내 입으로 뱉은 말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과분하게 잘해주시는 사장님 때문에 나는 더더욱 알바를 그만둘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다는 걸 알아차린 게 언제쯤이었던가. 아마 그 생활을 시작한지 2주도 채 안 된 시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방송국 교육 내내 병든 닭처럼 졸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눈에 불을 켜고 까내릴 거리만 찾고 있던 선배들이 그 광경을 가만둘 리 없었다.


  “너 도대체 뭐하길래 매일 와서 조는거야?”

  “죄송합니다.”

  “교육받기 싫어?”

  “아닙니다.”


  어떤 선배가 어느 시점에 날 붙잡고 혼을 내더라도 나는 변함없는 군대식 대답으로 일관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안 그래도 잠을 못 자서 시야가 뿌얘지고 관자놀이가 아파오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혼이 나니 미칠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누구보다 졸고있는 내 자신이 제일 괴롭다는 것을 아느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본래 성격같으면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나는 참고 또 참았다. 내가 원인을 제공했으니 혹독하게 견뎌보겠다는 심정이었다. 동시에 내 손으로 시작한 이중 생활에 대해 K.O.패를 선언했다.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낸지 한 달이 조금 넘어서던 즈음, 나는 주점으로 출근하자마자 사장님이 계신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지?”

  “……죄송해요.”

  “면접볼 때 분명히 말했지, 못할 거라고.”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니가 하겠다고 했으니까 지켜. 알바 금방 안 구해진다.”

  “다음 알바 구할 때까지 있을게요. 진짜 죄송합니다.”


  겁 없이 시작한 이중 생활의 말로는 처참했다. 그리고 사장님은 나에게 보란듯이 알바를 구하는 ‘척’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매일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출근했다. 모든 것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듯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동기 두 명이 방송국을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매일 선배들에게 먼지가 되도록 털리는 것은 내 쪽인데 동기들이 나가겠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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