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과 텍스트를 다루는 스토리텔러, 강혜련
<미디어IN싸를 찾아서>는 미디어오리가 미디어업계 인싸라고 생각하고, 더욱 인싸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다양하고 멋진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코너입니다.
외신기자, 인터브이 필름메이커, 확고한 취향의 음악리스너, 동료들의 멘토, 미디어오리 전략팀장...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혜련은 항상 찻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차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혜련은 허를 찌르는 질문을 자주 했다. 납작하고 기계적인 질문으로 취재하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가졌다. 그의 탁월한 질문 때문인지, 그와 인터뷰한 많은 사람들은 더 깊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은 혜련이 가진 ‘상대방에 대한 애정'에서 드러난다. 그만큼, 혜련은 대상자에 대한 공부에도 상당한 정성을 들인다.
그렇다! 나는 그를 닮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쑥스럽지만, 후배인 입장에서 좋은 선배는 우러러볼 수밖에 없거든. 그런 선배에게도 사회초년생이 하던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오직 그만이 고민하는 성장과 행복불안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외신기자 혜련부터 인터브이 혜련, 그리고 ‘그냥, 진짜 혜련’의 이야기를 찾아나섰다.
커피 없이 못 사는 제게 커피란 ‘피’와 같은 존재예요. 혜련 님에게 ‘차(茶)'는 뭔가요?
혹시 제 백그라운드를 알고 물어보시는 걸까요? 왜냐하면 제 커리어와 연관된 질문이거든요. 저는 기자 커리어를 시작하면서 커피를 끊었어요.
2015년 NPR(National Public Radio,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국) 서울사무국이 설립되면서 라디오 어시스턴트로 들어갔는데, 그 때 제 상사 Elise Hu와 같이 일을 하며 깨달은 것이 ‘이 일을 오래 하려면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시에 술, 담배, 커피를 모두 끊었어요.
1년 후 술, 담배는 돌아왔고, 커피는 오기가 생겨서 끝까지 끊은 채로 차를 마시고 있어요. 담배는 작년에 끊었습니다. 술은 영원한 인생의 동반자.
원래 옛날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죠. 미디어오리 이전의 혜련은 무슨 일을 했나요?
어린시절부터 글쓰는 것을 좋아했어요.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를 통해 기회를 얻어 자메이카 <The Gleaner> 일간지 인턴기자로 일을 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하루 8시간 출퇴근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인턴십 후에 영영 기자 일을 하기 싫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몇 년 뒤 베를린에서 열린 저널리즘 장학 프로그램에 우연히 합격되어, 3개월 간 전세계 다양한 기자들과 인턴십을 하게 되었어요. 20대 초중반에 ‘내가 무얼 하지, 내가 누구지?’와 같은 고민을 하다가, 기자가 된 친구들을 볼 때 가장 질투심이 드는 거예요.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한 번 시도해보자는 마음에 NPR을 다니게 되었어요.
NPR을 2년 다니면서 정말 많은 걸 했어요. 북한 핵 실험, 여성 인권, 박근혜 탄핵 등의 다양한 이슈를 보도했어요. 라디오, 텍스트, 영상까지 상사와 함께 작업하면서 좋은 ‘미디어 교육’이 되었던 것 같아요.
2년간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매체를 다루다보니, 저 스스로 가려운 것이 많아지는 거예요. 마침 2016년 하반기에 ‘코리아엑스포제’라는 독립영문매체가 저를 편집장으로 스카웃하고 싶어했어요. 당시 코리아엑스포제는 ‘메디아티'라는 미디어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의 투자를 받았어요. 함께 메디아티의 파트너사였던 닷페이스, 뉴닉, 디에디트, 널위한문화예술 등과 장충동과 혜화에서 한 사무실을 쓰기도 했죠.
한국의 미디어 스타트업계를 처음 접한 시기였어요. 코리아엑스포제 편집장으로 저는 적게는 5명, 많게는 열 몇 명의 직원을 관리하고, 콘텐츠 제작, 확산, 비즈니스 전반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외부인의 시각으로 한국의 소식을 전해야 했던 외신기자 시절과는 달리, 메디아티와 코리아엑스포제를 통해 국내 미디어계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가능성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어요.
한국에 상주하는 대부분의 서구권 외신기자들은 큰 매체에 기사를 기고하고, 콘텐츠 제작 후의 과정들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저는 미디어 스타트업계에 발을 들이면서 콘텐츠 제작뿐만 아니라 유통, 팀 운영, 비즈니스 등 굉장히 큰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어요. 물론, 직접 경험한 만큼 실패도 많았죠.
미디어 스타트업 세계를 통해 미디어오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당시 메디아티 영상전략팀장이었던, 지금의 미디어오리 김나리 대표를 만나게 되었어요. 미디어오리와의 직접적인 접점은 아무래도 ‘영상'이에요. 사실 미디어오리가 아니었어도 영상은 제 인생에 들어왔을 거라 생각해요. 이미 NPR, 코리아엑스포제에서 영상을 다뤘고, 저도 영상을 직접 만드는 거에 관심이 많았어요.
2018년 엑스포제 퇴사 후, 여기저기서 영상교육을 찾아다녔는데, 그 중 하나가 미디어오리(당시 영상IN) 영상편집 워크숍이었어요. 그 워크숍에서 제가 만든 영상을 김나리 대표가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기술적으로 다져지지는 않았지만, 제 편집 감각이나 스토리텔링을 보고는 미디어오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스카웃하셨습니다.
미디어오리의 초기 시절, 혜련 님은 어떤 일을 했나요? 특히, ‘인터브이' 초기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2019년 4월, 미디어오리와 함께하게 되었지만, 입사라고 보기에는 살짝 애매해요. 해외와 한국을 자주 오고갔던 시기거든요. 주 20시간 프리랜서 계약을 하고, 한국에 있을 때 일을 하며 회사의 첫 기틀을 다지는 것을 도와줬어요.
미디어오리 초창기 제 역할은 인터브이 영상과 미디어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김나리 대표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인터뷰 미디어’를 만들고 싶은데, 아직은 이름만 있으니 거기서 구체적인 걸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무턱대고 인터브이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인터브이 영상의 기획, 연출, 촬영, 편집, 홍보를 모두 하면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나갔어요.
브랜드 작업에는 전 닷페이스 디자이너였던 김헵시바 님과 함께 했어요. 미디어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었기 때문에, 저와 김헵시바 님이 백지 상태에서 브랜드를 설계하고 로고와 색상, 텍스트를 정했어요. 꼬박 6개월이 걸렸어요. 김헵시바 님이 인터브이의 초기 BI를 설립하는 데에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죠.
인터브이 영상을 만들며 기억하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어떻게 그렇게 모르면서 겁이 없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 생활 경력이 도움이 되었어요. 모르는 사람을 찾아서 섭외하고, 나와 이야기하게끔 설득하고, 스토리를 구성하는 과정이 낯설지 않고, 재밌었어요. 이렇게 <진원의 나이테> 국립공원연구원 진원 님, <경희의 닭> 농부 경희 님을 만나기도 했죠.
힘들었던 건 아무래도 기술적인 부분이었어요. 촬영장비나 편집 툴을 다루는 과정이 너무 힘든 거예요. 특히 그 과정을 혼자서 했기 때문에, 2-3년이 지나도 기술적인 성장에 한계가 있었어요. 지금도 촬영을 나가면 이 정도밖에 못하나, 자책을 해요.
기억나는 일화 중 하나는, <경희의 닭> 촬영을 위해 경희 님을 처음 만나러 영광군으로 내려간 날. 지원사업으로 촬영 예산이 생겨, 큰 마음을 먹고 비싼 장비를 대여했어요. 영광군 버스 터미널에서 시네마 카메라를 세팅하는데 3시간을 보냈어요, 너무 어려워서. 비싼 카메라를 똥손이 들면 정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웃음).
최근 <진원의 나이테>를 필두로 혜련 님이 만들어낸 인터브이 영상들이 사랑을 받고 있어요. 감회가 어떠신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는 주로 두 가지 매체를 다뤄요: 텍스트와 영상. 텍스트는 어린시절부터 저와 함께한 옛 친구, 영상은 성인이 된 후 막 친해지고 있는 매체. 영상이 매력적인 이유는, ‘텍스트로 언어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어요. 시청각적 감각에 호소해서, 한 순간을 스크린에 재구성할 수 있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무언의 도구'로 만들어진 영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상되고, 재해석되고,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떻게 언어화되는지, 유튜브 댓글로 볼 때 너무 신기하고 즐거워요. 댓글을 보면 ‘와, 내가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느끼는구나' 싶은 분도 있고. 또, 내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석하신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 해석도 너무 매력적인 거예요. 조회수를 떠나서 내가 만든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닿았구나, 이런 걸 볼 때 정말 행복하죠.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영상을 만드는 저도 제가 구체적으로 왜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 언어화할 수 없던 순간이 많거든요.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어떻게 보면 내 ‘무언의 의도’를 발견하는 과정이에요. 영상이 완성된 후에야 ‘아, 내가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인터브이 필름메이커'가 아닌 어떤 다른 일을 하셨나요?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나요?
인터브이 필름메이커 활동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간관리자로서의 비중이 더 커졌어요. 2019년 거의 저 혼자 인터브이를 만들고 운영했고, 2020년부터는 ‘강혜련 = 인터브이'라는 공식을 깨자는 팀내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인터브이 = 우리 모두의 프로젝트’라는 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저는 일부러 인터브이 운영에 손을 떼었어요. 대신 회사의 다른 업무에 집중했죠.
미디어오리가 하는 일이 다양하기 때문에 각종 프로젝트 팀장 역할을 맡거나, 다른 PM들을 서포트하는 역할로 많이 지냈어요. 예를 들어 미디어 인큐베이팅 사업의 공을 쥐고 팀형성을 위한 초기 리서치를 하거나, 비즈니스 매니저 김지현 님과 함께 지금은 잠정 중단된 ‘펠로우십'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어요. 작년에는 미디어업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오리콘아(오리지널 콘텐츠 아카데미)'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 운영했고, 창업 관점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교육인 ‘오리콘유스’에서 강연도 했어요.
제가 주 30시간 정규직으로 전환한게 불과 1년도 채 안됐어요. 지금 돌아보면, 작년까지 주 20시간만 일을 했는데, 이 많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인터브이 숏다큐 8편까지 어떻게 만들었지? 싶어요. 정말 신기하네요.
벌써 미디어오리는 나리 님을 포함해 7명의 동료직원이 있는 회사입니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혜련 님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미디어오리는 조직에 대한 실험을 자주 하는 곳이에요. 작년에는 김나리 대표가 ‘셀 구조'라는 형태로 회사를 ‘미디어셀’과 ‘비즈니스셀’로 나누었고, 2년차 주니어들이 각 셀의 리더로 배정되었어요. 일종의 리더십 훈련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공식적으로 비즈니스셀 팀원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초년생인 두 리드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했어요. 어떻게 보면 ‘PM의 PM’이라고 볼 수 있죠.
올해는 그 체계를 대폭 수정하고 효율화했어요. 셀구조를 없애고, 회사를 ‘전략팀’과 ‘콘텐츠팀’으로 나누어, 과거처럼 주니어들이 리드하는 게 아닌, 저와 같은 시니어급이 팀장으로 배정되어 팀을 운영하는 체계. 보다 보편적인 서열이 생긴거죠. 저는 전략팀장으로 세 명의 동료들을 관리하고 있어요.
전략팀은 어떤 일을 하나요?
지금은 전략팀 자체가 생긴지 얼마 안되어서 팀 체계를 수립하는 과정에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회사의 비즈니스 전략을 수립할 팀이에요. 현재는 각 팀원이 어떤 역할을 할지, 어떤 마일스톤을 설정할지 기초를 다지는 시기예요. 5월에 제가 퇴사한 후 새로운 팀장이 들어오게 된다면, 그 분이 지금의 기반을 사용하여 전략을 확장하겠죠.
미디어오리가 ‘인터브이'에 집중하게 되면서, 혜련 님이 홀로 묵묵히 지켜오던 인터브이에 모든 동료들이 함께 일하기 시작했어요. ‘인터브이'의 변화 속에서 혜련 님의 생각과 감정이 궁금해요.
오랫동안 인터브이는 회사의 사이드 프로젝트처럼 진행되었어요. 미디어오리는 2021년 하반기 전까지 컨설팅, 교육, 영상외주 사업을 주력으로 하면서, 틈틈이 시간날 때 인터브이 영상을 만들고 1년에 1-2번 관련 행사를 기획했거든요.
작년 11월부터 인터브이가 미디어오리의 주력사업으로 바뀌었어요. 인터브이라는 ‘숏다큐 미디어'로 실질적인 비즈니스 실험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모든 팀원이 인터브이에 집중하고 있어요. 지금은 회사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인터브이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인터브이 콘텐츠의 메리트가 있고, 최근 입사한 좋은 필름메이커들을 보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의 난제는, 포화된 콘텐츠 시장에서 어떤 차별화된 비즈니스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소수의 플랫폼이 독식하는 시장에서 어떻게 콘텐츠를 확산하고 유통할 것인가? 어떤 길을 찾게 될지 기대되네요.
자, ‘미디어오리’를 내려놓은 진짜 자아 ‘혜련' 타임입니다. 곧, 혜련 님은 퇴사를 앞두고 있어요. 어떤 심경인가요?
미디어오리에서 3년을 보내고 미국으로 이사를 가요. 시카고 근처 밀워키로. 밀워키는 미시건 호를 끼고 있는 중부 소도시. 도시를 관통하는 강도 세 개나 돼요. 미국 5대호는 지구상 가장 규모가 큰 담수계예요(전세계 담수 공급량 20%). 그 중심에 있는 밀워키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물 관련 연구 허브죠.
밀워키 곳곳에 남아있는 19세기형 산업 건물들이 너무 아름답고, 어딜 가도 갈매기 소리가 들려요. 또, 바로 옆에 있는 시카고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다이나믹한 미디어/영화 시장 중 하나잖아요. 거기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길에서 ‘방황’하게 될까? 불안할 때도 있지만 너무 설레요.
종종 혜련 님이 회사 밖에서 쓰신 기사, 혹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팀원들과 공유할 때가 있어요.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실 수 있나요?
외신기자로 저는 주로 여성인권과 한국대중음악을 주제로 기사를 써요.
K-pop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많기 때문에, 롤링스톤, NPR, 틴보그 등에서 아이돌 음악에 대해 기사를 작성했어요. 다행히 에디터들을 잘 만나서, 단순히 한 그룹의 차기작이나 신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음악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방시혁이라는 인물 탐구를 통해 BTS의 성공이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음악에 무엇을 시사하는지. 또는, “K-pop”이라는 용어 자체가 어떻게 주류 서구권 이외의 음악을 타자화하는 의도를 내포하는지.
여성인권에 대해서는 주로 워싱턴포스트, 닛케이에 칼럼을 기고했고, 그때그때 발생하는 인권유린 사건, 최근 대선과 페미니즘 운동의 시사점을 도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고요. 타임 매거진을 통해 박원순 전 서울 시장에 대해 쓴 기사가 기억에 남아요. 그를 ‘페미니스트 스타’로 부상시킨 1990년대 후반 국내 최초의 성희롱 사건을 재조명하고, 그 사건을 담당한 여성 판사를 인터뷰해 2020년 미투 사건을 탐구했어요.
혜련 님이 호스트로 있는 음악 프로그램 ‘시적허용'에 대해서도 조금만 이야기해주세요.
해외에 노출되는 대부분의 한국음악은 아이돌 음악이잖아요. ‘시적허용(Poetic License)’은 ‘이러한 장르의 음악 말고도 다양한 음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거대자본만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 좋은 음악을 만드는 아티스트를 위한 장을 만들자’는 취지로 해외 오디언스를 타깃한 음악쇼케이스 프로그램이에요.
음악 콘텐츠 에이전시 ‘플립드코인뮤직’이 기획하는 프로그램이죠. 플코뮤의 자회사인 (주)ALPS의 이수정 이사가 제 NPR 기사를 좋아했고, 저를 진행자/작가로 섭외했어요. 현재 네 개의 에피소드가 제작되어 3월 말부터 발행이 시작됐어요. 올해 여건이 된다면 더 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에요.
앞으로 혜련 님의 성장방향이 궁금해요. 무엇이 되고 싶나요? 어떤 것을 꿈꾸나요?
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지금까지는 비교적 소극적으로 제 커리어가 만들어졌어요. 무슨 말이냐면, 누군가가 나를 스카웃하거나 일을 의뢰하면 저는 ‘하겠다'고 동의해서 포트폴리오가 쌓인 거죠. 앞으로는 제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벌이고 싶어요.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잖아요. 2012년 베를린 인턴기자 시절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선배기자가 우크라이나인이었어요. 그 선배는 지금도 키이우에 상주하면서 전쟁 상황을 보도하고 있어요. 요즘 그와 연락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요. 내 자신에게 떳떳한 일을 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귀기울이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할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걸 만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나에게 어떤 목소리, 어떤 특권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 내가 은연 중에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떤 편견일까? 내 안의 특권과 편견을 직시하고, 내 목소리를 어떻게 잘 사용해야, 죽기 전에 거울을 봤을 때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미디어오리 이전 혜련의 꿈과 달라졌나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이전에도 저는 스스로를 스토리텔러라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다리’ 역할을 잘 해요. 변함 없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기자와 감독이 되고 싶어요.
글/인터뷰 홍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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