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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May 05. 2021

나이 들면 잠도 철이 든다.

전원일기 다시보기 <아파트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일주일 동안 격무에 시달리다 토요일 오후 늦게야 퇴근한 첫째 김 과장은 피곤하여 낮잠을 자려고 눕는다.

고추 모종 문제로 둘째 용식과 아버지의 의견 대립으로 집안의 분위기가 냉랭하다. 한 집안에 두 농사꾼이 있으면 의견 다툼이 있어 안 좋다며 부자간의 농부 고집을 탓하는 김 회장 부인의 목소리도 오늘따라 날이 서고 높다. 집안이 이래저래 시끄럽다. 


냉랭한 집안 분위기와 마당에서 들려오는 집안의 온갖 소리에 신경이 쓰여 쉬이 잠들지못한다.

게다가 부인은 낼 부부 동창회를 가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고 선풍기 닦아달라, 압력밥솥을 고쳐달라는  주말에 해야 할 주문 사항을 쏟아낸다. 피곤에 찌든 김 과장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피곤하고 짜증이 난다. 문득 오전에 김계장이 했던 말이 오른다.

" 박계장 아파트가 주말에 빈대요. 주말에 모여서 친목 도모하라고 아파트 열쇠를 주고 갔어요."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공중전화기로 뛰어간다. 김계장에게  20분 뒤에 전화를 하라고 부탁하며 빈 아파트에 자러 가는 1박 2일의 가출도모한다


20분 뒤, 김 과장 부인은 군수님의 주말 등산에 김 과장이 참가해야 한다는 김계장의 전화받는다. 피곤한데 웬 등산이냐, 주말에 쉬지도 못한다며 투덜거리는 김 과장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속아 부인은 등을 떠밀고, 김 회장 부부는 피곤한 몸으로 집을 나서는 아들을  안쓰러이 바라본다.


발걸음도 가볍게 빈 아파트에 입성한 김 과장, 누구의 눈치도 잔소리도 없어 좋다며 양말을 집어던지고 음악도 크게 틀고 셀프 야호로 집에 확인 전화도 하며 완전범죄를 꿈꾼다. 자유의 바다를 만끽한다.


읍내 아파트에서 화장품 방문 판매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보배엄마가 김 과장을 아파트에서 목격하고, 아파트에 사는 군청 직원의 집에 여자가 들락거리는데 그 아파트에 김 과장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진다. 일용엄마는 김회장댁에 가서 대쪽 같은 김 과장이 어떤 버들강아지에게 넘어갔는지 궁금하다며 소문을 전하고 김 과장 부인과 동서 순영이 아파트로 달려간다.


한편, 담배를 사러 나온 김 과장은 아들 집을 찾는 할머니를 돕느라 주말 오후의 자유를 빼앗긴다. 급기야 지친  할머니를 업고 가가호호 문을 두드려 겨우 집을 찾아준다. 내 복에 무슨 주말 오후의 자유냐며 투덜거리며 아파트로 돌아오던 중 아파트 계단에서 기다리던 부인과 맞닦뜨린다.


놀라는 김 과장과 부인이 실랑이를 벌이던 중, 할머니의 아들 부부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와서 오해가 풀린다.

돌아오는 길, 미안하다며 시끄럽고 소란해도 우리 집이 최고라며 너스레를 떠는 김 과장과 부인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보인다.


남편은 잠을 잘 잔다.(아주 잘 잔다.)

드라마 속 부부들은 잠자리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든다. 결혼을 해보니 다 그렇지도 않다. 베개만 닿으면 잔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주말이면 낮잠도 잔다. 코골이도 심하다.

나는 잠을 잘 들지 못한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고 헤매다 겨우 잠이 드니 혼자서 잘 자는 남편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낮잠도 못 잔다. 잠을 잘 못 자니 코도 골지 않는다. 밤이나 낮이나 잘 자는 남편이 부럽기도 했다.

잠으로 치면 남편의 맛(https://brunch.co.kr/@ibjk65/71)에서 김 회장보다 한 수위라고 했었는데 남편은 김 회장 부자를 한 방에 이긴다. 시끄러워도 집안일이 밀려있어도 잘 잔다. 씬 한 수 위다. ㅎㅎ 

다행히 가출은 하지 않았다.


가출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 것만은 아니다.


남편의 젊은 시절, 주말까지 반납하며 회사에 가는 날도 많았고 평일의 퇴근 시간 또한 많이 늦었다. 맞벌이를 하며 나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청소며 설거지를 남편의 퇴근 시간까지 하지 않고 미루어 둘 수 없었다. 직장일에 독박 육아에 평일의 체력으로 할 수 있는 가사노동력이 제한되어 있어 주말로 미루어둔 집안일이 많았다.


주말이 되면 남편도 나도 쉬고 싶다.

남편은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여 오밤중에 퇴근하고, 게다가 업무 강도도 세니 주말에는 늘어지게 자고 편히 쉬고 싶다.

나는 출퇴근 시간은 일정하고 남편에 비해 업무 강도는 세지 않지만, 평일의 가사노동과 독박 육아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으니 주말에는 늘어지게 자고 편히 쉬고 싶다.


주말 아침, 늘어지게 잔다.

문제는 주말로 미루어둔 집안일이다.


"이거 저거 그리고 그거까지 해줘."  VS  "알았어. 한 숨자고 할게."

남편은 절대 "NO"는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Right Now"하는 사람이다.


나는 씩씩거리며 집안일을 한다.  VS  남편은 평온한 얼굴로 잔다.

옆에서 아이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하고 TV 소리가 높아도 잠을 청한다. 이내 쿨쿨 드르렁이다.

얼마나 피곤하면 저럴까 이해를 하지만 화가 난다. 나도 피곤하다.

해야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저렇게 잠이 오냐? 잠보를 넘어서 철면피보다 더한 잠면피라고 욕을 하며 혼자서 씩씩거린다.

남편이 자고 일어나서 한다는데, 기다렸다 같이 하면 되는데, 빨리 해치우고 잠깐이라도 쉬고 싶어 혼자서 집안일을 한다.

약이 바짝 오른 나에게 같이 자던지 쉬던지 하지 왜 혼자서 힘들게 하냐며 남편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하여 남은 주말을 대부분 평온하게 마무리하였지만, 내 잔소리의 양과 강도가 센 날과 남편의 인내력이 대립하는 날은 시끄러운 주말이 되었다.


세월이 유수같이 흘렀다.

남편은 변함없이 잘 잔다. VS 나는 이제 낮잠도 자고 밤에도 남편보다 더 일찍 잠이 든다. 코도 곤다.

남편의 회사일도 수월해졌다. 퇴근 시간도 빨라지고 주말에 출근하는 일은 없으니 설거지며 청소, 힘든 집안일은 남편의 몫이 되었다. 주말의 낮잠도 줄어들었다. 밤엔 늦게 까지 영화도 보고 여전히 잘 잔다.

나도 가끔 일을 하긴 하지만 명퇴도 했고 독박 육아도 없다. 힘든 집안 일도 거의 없다. 힘들었던 갱년기의 끝이 보이고 이제 잠도 잘 잔다. 남편이 자도 좀 덜 씩씩거린다. 평온한 주말이 되었다.


잠을 자고, 못 자고 해서 김 과장 부부도, 우리 부부도 집안이 시끄러웠다.


늙어가면서 이제 잠도 나이가 들었고, 나이 드니 잠도 철이 들었다.

피곤을 참지 못하고 잠에 빠져 나의 씩씩거림을 감내해야 했던 남편의 잠은 이제는 적당히 조절이 가능하게 되었다.

피곤을 참지 못해 대쪽 같은 김 과장을 한 순간에 바람둥이로 만들었던 잠도 나이 든 김 과장의 잠이 되면 가출하지 않을 것이다. 냉랭한 집안 분위기에 시끄러운 온갖 소리에도 적당히 눈 감고 잠을 청하지 않았을까?

해야 할 일에 짓눌려 잠을 자지 못하던 나는 갱년기에 밤을 새우며 징징거리다 이제는 세월에 져서 지친 몸을 나이 든 잠에 맡겨버렸다.


우리 부부는 지금의 나이, 지금의 잠이 좋다.

젊은 청춘도 좋았고 독박 육아와 회사일로 지쳐도 우리 아이들의 웃음이 예뻤던 그 시절도 좋았지만 편안하게 잘 수 있고, 자고 나면 편안해지는 지금이 좋다.


남은 우리의 인생도

남은 우리의 잠도

잘 늙어가는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면 좋겠다.


오늘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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