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호수가 흐르는 도시

#11. 인터라켄 2014 (2)

by 스토리텔러

인터라켄 하면 융프라우를 떠올리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융프라우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인터라켄은 융프라우가 있는 곳보다는, 아름다운 두 호수를 낀 마을로 기억되고 있다. 웅장함이나 감동으로는 거대한 설산이 고작 두 호수보다 압도적일 테지만, 그렇다고 꼭 기억에서 마저 더 강렬한 건 아닌가 보다. 나에게는 에메랄드와 사파이어의 빛을 간직한 튠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가 더욱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있다. 왜 그런지 오랜 시간 고민한 결과, 나름 납득이 가는 답을 얻었다.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차이 아닌가 싶다.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길 때, 기억은 오히려 강렬하게 남는 것 같다. 스키를 타고 싶다는 조급함, 고산증 때문에 힘들어서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즐겼던 융프라우와 그저 한적하게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즐긴 두 호수. 그 마음가짐이 인터라켄에 대한 내 기억을 만들어냈다.




사파이어 빛을 머금은 브리엔츠 호수


인터라켄은 '두 호수 사이에 위치한'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도시의 어원 자체가 저러니 그 두 호수를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다고 생각했다. 동쪽에 있는 브리엔츠 호수와 서쪽에 있는 튠 호수. 두 장소 중 어디를 먼저 갈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눈감고 찍어서 브리엔츠 호수로 정했다. 선택 과정은 다소 즉흥적이었지만,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웠다. 체력이 넘치는 아침에는 브리엔츠 호수를 걷고, 오후에는 유레일 패스로 탈 수 있다는 유람선으로 튠 호수를 즐기기로 말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먹고 푹 자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브리엔츠 호수를 산책할 거란 말을 들은 주인 할머니는 손수 싸신 샌드위치와 작은 병에 오렌지 주스를 담아주셨다. 걷다가 보이는 아무 벤치에 앉아서 먹으면 천국을 걷는 기분일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현지 사람의 추천은 무조건 받아봐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에, 감사의 인사를 표하며 길을 나섰다.


마을에서 딱히 '브리엔츠 호수의 입구입니다'라는 표시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눈에 보이는 호수를 목표 삼아 계속 걸었다. 물론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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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엔츠 호수로 향하는 흔한 마을 길


걷다 보며 느낀 건데, 인터라켄은 도시보다는 마을이라는 인상이 더 센 것 같다. 분명 규모 자체는 도시라 불러도 전혀 무리가 없지만, 내 활동반경이 좁은 것도 있고, 건축 양식 자체가 유럽 중세 시대의 마을을 연상시키다 보니 더욱 그렇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수 백 번도 더 하며 무작정 호숫길을 따라 걸었다. 사실 이미 브리엔츠 호수를 걷고 있으니 내 산책은 시작된 것이다 다름없었다.


그렇게 이른 아침이 아닌데도 고요한 마을, 호숫가 언저리에서 놀고 있는 오리들, 그리고 깨끗한 물에 반사되는 맑은 하늘들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준다. 이렇게나 마을과 인접해있는데 어쩜 이리 깨끗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청소를 한다 해도 물 전체가 이 정도로 투명하기는 쉽지 않을 터. 하긴 호수 주변에는 근대식 건물을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물이 더러워질 건더기가 없는 곳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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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아니라 산속인 줄 알았다


걷다 보니 별 것 아닌 장소들도 괜스레 예뻐 보였다. 마음이 평안해서인지 사소한 것들도 소중해 보이는 기적이 일어난 걸까? 내가 호숫가를 거니는 건지 산속을 걷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다 혼자서 아차 했다. 애초에 이곳은 산길이며 동시에 호숫가였다. 아마 다양한 테마를 가진 길들이 번갈아가며 훅 들어오니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SAM_1631.JPG 내 의문에 가장 큰 일조를 한 길


호숫가를 걷다가 갑자기 철로길이 나오고 언덕이 나오고 그러는데 헷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며 계속 걸었다. 기찻길을 따라 걸으니 '이렇게 쭉 걷다가 호숫가가 아니라 아예 다른 도시로 가버리는 거 아냐?'라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이스탄불에서 정처 없이 걷던 첫째 날이 잠시 떠올랐다. 그냥 브리엔츠 호수도 유람선을 탔어야 됐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전경.JPG 예고도 없이 나타난 광경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육성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주변에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한몫했지만 말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주택들과 탁 트인 호수가 여태까지의 고민을 날려버렸다. 꽤 크게 지어진 주택들은 원래 상주용인지 누군가의 별장인지 몰라볼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호수는 이게 호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캐나다에서 잠시 봤었던 온타리오 호수쯤은 돼야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긴가민가 했지만, 주택에 딸린 사유지?(확실하지가 않다)들을 조금 거닐었다. 최대한 길이 나있는 곳으로만 걸었다. 안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타지에서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에 사진은 찍지 않고 외곽으로만 돌다가 이내 호숫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태까지도 내 스마트폰의 배경화면을 차지하는 광경을 맞이할 수 있었다.


동화속풍경.JPG 동화라는 단어를 머금은 듯한 풍경


준비된 자리였던 건지, 바로 앞에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주인 할머니께서 싸주신 샌드위치랑 주스를 꺼냈다. 그리고는 이런 풍경을 보면서 꼭 듣고 싶은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물 색이 사파이어 빛 같다는 말은 절대로 허언이 아니었다. 어떤 오묘한 작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브리엔츠의 호수는 찬란한 사파이어 색을 머금고 있었다. 그 옆에 펼쳐진 무성한 초록 잔디와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눈 덮인 산, 그리고 맑은 하늘.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샌드위치인데도 그 어떤 샌드위치보다 맛있었고, 터키의 오렌지 주스에는 비교할 바 못 되는 주스였는데도 그 어떤 주스보다 달짝지근했다.


꿈같은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다. 유람선을 안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을 원하는 만큼 마음껏, 정지된 상태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여기에 자리를 깔고 눕고 싶었고,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내고 싶었으며, 더 나아가 작은 집을 지어 살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순간이 더욱더 소중했다. 삼켰던 샌드위치들이 아예 소화가 될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튠 호수를 찾아갈 시간이었다.




에메랄드와 노을빛을 담은 튠 호수


왔던 길을 되돌아와 인터라켄 중심지까지 도착하는 데는 생각보다 얼마 안 걸렸다. 등산할 때 보다 하산할 때 시간이 덜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 와중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행객 두 분이 나에게 다가와 서툰 영어로 길을 물었다. 잠시 머릿속에 '내가 한국인처럼 안 생겼나'라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다. 그러나 맑은 호수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납득했다. 옷은 나름 번듯하게 입었으나 면도기를 다 써서 정리 안 된 수염, 그리고 2주가 넘어가는 방랑 생활에 어딘가 모르게 초췌해진 모습. 쓴웃음을 짓고는 나를 한국인이라 소개하며 가시려는 곳이 어디냐고 여쭤봤다.


놀랍게도 그분들이 찾는 곳은 내가 묵는 숙소였다. 애초에 유명한 숙소가 두 개이니 반반 확률이었지만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이 나와 같은 숙소를 찾는다는 것에 알게 모르게 정이 갔다. 나도 거기서 묵고 있다고 간단하게 소개한 뒤에 그분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숙소까지 데려다줬다. 어차피 튠 호수에 가는 길이기도 했고, 그분들은 어떤 여행을 해왔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화 내용은 단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그분들을 숙소에 데려다주고 나는 다시 튠 호수를 향했다.


이번에는 유람선을 타려고 했지만, 여기서 예기치 않은 장애물에 봉착했다. 분명 유레일 패스로 유람선을 탈 수 있는데, 접수원이 이 패스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분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유람선은 출발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내가 가진 유레일 패스의 매뉴얼을 읽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유레일 패스를 잘 못 산 것이다. 당시의 난 순진하게도 이 4 지역 구역 패스가 있으면 30일 동안 무제한으로 기차를 탈 수 있는 줄 알았다. 실상은 30일 동안 4 지역 내에서 특정 횟수만을 탑승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인터라켄을 오며 허용 가능한 횟수를 다 써버린 나였다.


역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여행 준비를 하면 이런 상황이 발생하나 보다. 어차피 여행 와서 돈을 아낄 수는 없었기에 유람선 티켓을 사려고 했지만, 다음 출발 시간은 무려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튠 호수도 걷기로 했다. 브리엔츠 호수에서의 산책이 너무 좋은 기억을 줬기에 튠 호수도 걸을만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항구.JPG 유람선 안녕...


항구를 떠나 튠 호수를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번 발걸음에는 확신이 넘쳐났다. 브리엔츠 호수에서 했던 쓸데없는 걱정과 의심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마음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걸었다. 그랬기에 눈에 담을 수 있던 것들에 또다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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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접어드는 인터라켄의 호숫가


느긋한 마음으로 인터라켄 시내를 감상했다. 애초에 이런 걸 보려 인터라켄에 왔으니 내 본래 목적에 충실한 셈이었다. 목초지에서 자유롭게 방목되어 있는 소들을 보며,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물론 그저께 먹은 송아지 스테이크 때문에 이들에게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송아지가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었을까...라는 끔찍한 생각을 하다가 서둘러 이를 떨쳐내고 길을 나섰다. 이상하게 오후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시끌벅적은커녕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많은 여행객들은 다 유람선에 탄 것인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튠 호수 산책로는 브리엔츠 산책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무겁고, 짙고, 어두웠다. 단순히 아침과 오후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숲의 울창함이나 나뭇가지들의 상태가 주는 느낌이 상이했다. 브리엔츠가 도시 근교에 있는 유명한 등산로를 걷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거대하고 깊은 산속을 걷는 기분이 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길 자체는 여기가 더 잘 닦여있었다.


SAM_1700.JPG 낙엽 진 튠 호수의 산책로


브리엔츠 호수도 홀로 걸었지만, 이곳은 홀로 걸음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고독하고 혼자라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만큼 고요한 곳이었다.


호수2.JPG 한 시간 내리 본 호수


뭔가 브리엔츠 호수보다 규모도 작고 물길도 너무 좁아서 이게 진짜 맞나 싶은, 또 쓸데없는 의심병이 도졌다. 가끔가다 현지인들이 조정을 즐기며 나에게 손을 흔들어준 것 제외하고는 완벽한 침묵 속의 한 시간이었다.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다 보니 슬슬 다리마저 아파왔다. 그럴 만도 했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단순히 걸은 거리만 해도 거의 24km 가까이 됐으니 말이다. 새로운 것을 찾으면 그 피로도 날아갈 텐데 같은 풍경만, 그것도 우중충한 곳에 있으니 피로감이 더 했다. 이럴 거면 유람선을 탈 걸 그랬나라고 또 아쉬움을 갖는 사이, 신기하게 자연은 나에게 새로운 보상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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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노을에 물들어가는 튠 호수


튠 호수가 왜 에메랄드 빛이라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리엔츠가 청량한 사파이어였다면, 이곳은 조금 더 짙고 영롱한 에메랄드 색을 띠고 있었다. 거기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햇살이 더해져,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다시, 유람선을 안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만 몇 번이나 의심하고, 후회하고, 감탄하는 걸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브리엔츠 호수가 태동하는 생명의 아름다움이라면, 튠 호수는 소멸해가는 생명의 아름다움이었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져서 그런지 몰라도, 튠 호수는 오후에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근처에 널린 낙엽, 두껍고 잎사귀가 떨어져 내리는 중인 나무들이 이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두터운 산맥들...


SAM_1711.JPG 황혼빛에 물든 튠 호수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아래로는 맑은 호수, 위에는 거대한 산과 아름다운 하늘. 물은 또 어찌나 맑은지 수면에는 하늘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모습에 넋이 나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노을은 이스탄불의 금각만, 산 토리니에 이어서 유럽의 5대 노을(내 멋대로 이름 붙인)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노을이었다. 한 시간 동안 엄습했던 피로가 싹 다 날아갔다. 평소에 낚시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이곳에 앉아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낚시를 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뒤에는 빙산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거대한 자연을 감상하고 있을 때쯤, 근처에서 유람선이 도시를 향해 지나갔다. 아마 내가 왔던 길보다 더 넓은 지류 쪽으로 갔다가 이곳에서 돌아나보다.


유람선의 행보에 맞춰 나 역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오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던 거 같은데, 신기하게 하나는 기억난다. 지금 사진을 찾아보며 올려서 그런지 몰라도, 소멸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보통 소멸이라 함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황홀한 튠 호수를 보고 있자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답게 소멸해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모든 것들을 튠 호수처럼 마무리해야겠다는 거창한 다짐을 한 채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내가 아까 길을 안내해준 분들도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잠깐 서로가 했던 여행에 대해 담소를 나눴고, 나는 배가 너무 고팠기에 밖으로 나가서 식사를 해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분들도 아직 저녁을 안 먹었다고 하셔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를 옆에서 듣던 주인 할머니분이 치즈 퐁듀가 맛있는 곳이 있다며 우리에게 레스토랑 한 군데를 추천해주셨다. 인터라켄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공원 옆에 위치한 곳이었다.


퐁듀.JPG 본토 치즈 퐁듀


치즈 퐁듀라는 것을 한국 뷔페에서 먹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접 시켜서 먹는 건 처음이었다. 냄비에 직접 치즈를 끓여서 빵을 찍어먹는 본토의 퐁듀 맛은 환상적이었다. 아마 걷느라 지친 몸이어서 그랬던 걸까? 순식간에 퐁듀와 일행분이 시키신 스테이크를 함께 나눠먹고, 인터라켄의 저녁거리를 걸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가장 인상 깊은 여행지는 어디었는지, 앞으로 향할 곳은 어딘지, 혹시라도 팁이 있다면 뭐가 있을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져 갔다.




원래는 오늘 융프라우에 올라가며 들렸던 스키장에서 스키를 타려고 했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두 호수의 경치는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아쉬움을 시원하게 씻겨냈다. 아직 이곳에서 못해본 것들이 많았다. 스키도 타야 했고, 인터라켄의 명물이라는 패러글라이딩도 못해봤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미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게 튠 호수의 아름다운 노을이라 그런지, 이대로 이 여행지를 마무리해야 더욱 로맨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도시는 내 유럽 여행지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몇 안 되는 곳으로 기억되는 장소 중 하나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감동을 얻은 이 도시는 다른 곳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개념보다는, 특별하다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그 후에 다닌 그 어떤 여행지를 떠올려봐도 이곳만큼 자연에서 감동을 얻은 곳은 호주 말고는 없던 것 같다. 보통 한 번 왔던 여행지를 다시 오는 걸 꺼려하지만, 인터라켄은 한 번 정도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그렇게 나는 스위스, 인터라켄에서의 고요한 밤을 맞이하며 다음 일정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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