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토리텔러 Apr 07. 2021

가족들과 섬 끝 마을에서

#5. 오키나와 2016


가족들과 첫 해외여행


 일본이라는 나라는 여행자로서의 나에게 매우 애매한 위치를 갖고 있다. 일본 여행을 안 가본 건 아니지만, 본토보다도 남쪽 위주의 여행을 주로 다녔다. 그렇다고 본토 쪽 도쿄, 오사카를 안 가본 것도 아니지만, 너무 어릴 때 일이라 어디를 갔는지 기억조차 제대로 안 난다. 그러니 글을 쓸만한 소재가 없다.


 또한 혼자서 제대로 일본을 여행해본 적도 없다. 여행이라 부르기에 애매한 한 일정을 제외하고는 죄다 가족 여행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전까지 망설임이 컸다. 브런치에는 혼자 여행 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고 싶은데, 가족 여행은 여태 써온 글들의 정체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에도 뚜렷이 남고, 좋은 추억들로만 가득한 이 여행을 이상한 규칙 때문에 묵혀두는 것도 아니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여행들이 없었다면 일본으로 여행 가고 싶은 욕구조차 안 들었을 것이니, 어떻게 보면 의미 있는 여행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그 어떤 것들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이 여행이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함께한 해외여행이라는 점이다(당시 군인이었던 둘째 동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국내에는 수도 없이 여행을 다녔지만, 해외에 여행을 목적으로 가족과 함께 간 기억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특별하다. 코로나 시국이 다가오고, 아들들이 서른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가족끼리 또 해외여행을 가는 게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소중한 순간들을 꼭 브런치에 남기고 싶었다.


 사실 오키나와 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관여한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오키나와라는 곳은 나에게 썩 매력적인 여행지도 아니었을뿐더러, 딱히 뭐가 있다고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다 어머니가 혼자서 일정을 짜고 우리는 그에 따랐을 뿐이다. 원래 여행지에서는 절대로 이러지 않는데,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오키나와를 다녀온 1주일 뒤에 바로 나 혼자 떠나는 대만 여행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천등 축제를 볼 생각에 들떠 있는 내게 일본 남쪽의 자그만 섬 동네가 눈에 찰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렇게 별 관심 없는 여행지였기 때문에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여행지 자체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그곳을 가느냐도 너무나 중요한 요소라는 걸 절실히 깨닫게 해 준 곳이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곳에서 보낸 2박 3일이 이렇게나 따스한 기억으로 남을 줄이야. 사진을 의욕적으로 찍은 것도 아니라 기록이 많지도 않고, 순서 또한 뒤죽박죽이다. 그래도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이 기억들을 풀어내 보고자 한다.



해가 지는 마을


 오키나와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를 뽑으라면 분명 선셋 비치가 등장할 것이다. 사실 나도 왜 유명한지는 모른다. 일단 우리가 갔고, 주변에 오키나와를 다녀온 사람들 모두 간 걸 보면 유명한 곳은 맞는 것 같다. 실제로도 오키나와에서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곳, 동시에 가장 오키나와를 잘 대변한다고 느끼는 곳 모두 선셋 비치 근처니까 말이다.


가족끼리 해외에서 먹는 첫 식사


 어머니가 찾은 철판 야끼 맛집에서 식사를 한 뒤에, 소화도 할 겸 선셋 비치를 가족들과 함께 걸었다. 시기로 보면 꽤 성수기에 속하는 때인데 생각보다 사람이 없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혼자 여행 다닐 때도 비수기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로선, 한국인들 혹은 여행객들이 우글거리는 분위기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현지인들이 더 많아서 그런지, 오히려 가족끼리 그냥 근처 바다에 마실 나온 느낌이 들어서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만약 우리 가족이 지금 사는 서울이 아니라, 내가 처음 태어난 진해에서 계속 살았다면 이런 시간을 자주 보내지 않았을까? 바다 바로 앞 아파트에서 살던 서너 살 시절이 잠시 떠올랐다.


선셋 비치에서 노을이 가까워진다


 선셋 비치 바로 앞에는 아메리칸 빌리지라는 곳이 있다. 차이나 타운과 얼추 비슷한 개념으로 보면 된다. 오키나와에는 미군 주둔 부대가 있다. 그렇기에 오키나와 본토 색에 미국 감성이 덧칠해진 그런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곳이다. 그 정수가 모인 곳이 바로 아메리칸 빌리지다. 하와이나 이태원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분위기 아닐까 싶다.

 

선셋비치와 아메리칸 빌리지 사이 그 어디쯤


 남쪽 섬나라라 그런지 하늘이 더욱 광활하고, 구름 역시 거대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 모든 것들이 땅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바다 위를 떠다니는 땅에 잠시 얹혀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저 멀리서 살짝 비치는 분홍빛 하늘이 참 아름다웠다. 그 밑으로 보이는 일본식 가옥과 미국식 건축물들이 혼재되어 더욱 몽환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개인적으로 위 사진은 내 기준에서 오키나와를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사진이다. 1년 가까이 내 스마트폰의 배경화면을 장식한 사진이기도 하다. 관람차 뒤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몽실몽실해진다.


 사실 위에서 하와이를 언급하긴 했지만 한 번도 하와이를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하와이도 오키나와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물론 규모가 화려함에 있어서는 비교도 불가능하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섬의 쓸쓸하고 적적한 분위기에 서구적인 분위기가 얹혀있는 그런 곳일 것만 같다. 서양에서 섬의 외로움을 산 토리니에서 느꼈다면, 동양에서는 오키나와가 같은 위치에 있는 여행지라고 생각이 든다.



오키나와의 대자연


 오키나와는 생각보다도 커다란 자연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장소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세 군데 있다. 첫 번째는 만좌모다. 바다 바로 옆에 기암괴석이 늘어선 곳인데, 그중 암석 하나가 코끼리와 똑같이 생긴 걸로 유명한 곳이다. 생각보다 높은 암석 위에서 광활한 바다와 코끼리 모양의 암석을 함께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바다를 가르며 육지로 향하는 그런 영화 같은 장면이 상상된다. 그 웅장함에 아주 잠시 압도당한다. 바다와 코끼리라는 단어가 주는 큰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에 답답한 것이 있다면 그 답답함,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꽉 막힌 것들을 한 번에 풀어주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만좌모를 대표하는 코끼리 암석


대낮인데도 노을 같은 신기한 오키나와의 하늘


 두 번째는 오키나와의 북 해안도로다. 사실 여기는 딱히 지명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오키나와 남부 혹은 중부에서 북부로 올라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도로다. 고속도로는 아니고, 그저 하나의 길일뿐인데 그 특유의 청량함 때문에 속이 뻥 뚫린다. 차가 막히지 않아서 적당히 안전한 속도로 마음껏 달릴 수 있다. 측면에 보이는 맑고 푸른 바다는 보는 내내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가끔가다 지나치는 자전거 무리들을 보면, 당장이라도 자전거를 빌려 이 아름다운 도로를 맘껏 달리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가족과 함께 이곳을 드라이브하며 나누는 소소한 얘기가 참 좋았다. 가끔가다 뒤에서 꾸벅꾸벅 졸던 나와 내 동생. 명절 때 부모님이 운전하고 자식들은 뒤에서 자던 꽉 막히던 고속도로 감성이 생각나기도 한다.

 

자전거 달리고 싶게 생긴 해안 도로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해안도로


 마지막은 오키나와 북부에 있는 대석림산이라는 곳이다. 사실 산이 무슨 여행지냐 싶을 수 있지만, 이곳의 산은 열대 지역의 산이라 그런지 확실히 오르는 맛이 있다. 일단 산을 오르기 전에 보이는 산의 전경 자체가 너무 아름답다. 우리가 평소에 보는 녹색만 가득한 그런 산이 아니라, 대석림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거대한 돌덩이처럼 생긴 산이다. 그 사이로 듬성듬성 나 있는 열대 지역 나무들을 보자니, 내가 지금 쥬라기 공원의 촬영장에 와있는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안 그래도 조용한 오키나와인데, 산 초입부를 지나 산 안쪽으로 들어가면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느낌을 준다. 지구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들이 태동하는 다른 행성에 와서 탐험을 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나 영화 아바타에 나올법한 나무들의 모습은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상황만 허락한다면 한밤중에 이곳에 와보고 싶다. 세상에 발견되지 않은 이상한 반딧불이들이 떠다니며 나를 맞이해주고,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줄 것만 같은 곳. 그곳이 바로 대석림산이다.


웅장한 자태의 대석림산


아바타에 나오는 영혼의 나무
산 꼭대기에서 바라본 오키나와 북부의 전경



감성 한 가득


  섬이라는 공간이 원래 그런 건지, 오키나와에서 동화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장소가 있다. 비세 후쿠키 가로수길이다. 이곳 역시 어머니가 가자고 해서 간 곳이었고, 이름만 들었을 때 그 어떤 것도 기대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서 대략 십여 분간 걷다 보니, 내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후쿠키 가로수길은 일본의 시골 소도시 감성이 그윽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숲길로만 여겼지만, 어떤 한 광경을 보고 난 뒤부터는 다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의 그 광경


 햇살이 느긋하게 비치는 가로수길 저 멀리, 한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가며 이곳을 바라보고 계셨다. 시골길에서나 볼법한 그런 광경에 적당히 따스한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햇빛은 그때부터 내 마음까지 녹이기 시작했다. 시골을 경험해본 적 있고, 그 기억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시골'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있다. 그 흙냄새 나고 촌스러운 감성이 시간 흐를수록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 후쿠키 가로수길은 그런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명소라고 해서 사람들이 몰릴만한 그런 카페들이 늘어서 있지도 않았다. 철저히 현지에 사는 사람들을 배려한 곳이었기에 이곳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감성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다.


거리 곳곳에 보이는 소품들


 거리를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팔거나 전시 해놓는데, 이것이 단순히 장사하는 행위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사는 분들이 그저 취미로 가볍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여서 더욱 사람 냄새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오히려 그게 마케팅 포인트였을지도?


 그냥 걷기만 해도 좋은 산책 코스가 있다. 후쿠키 가로수길이 그런 곳이다. 거기에 더해 입구에서 파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조금씩 할짝이며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다 보면 자연스레 몸과 마음이 풀어진다. 예쁜 거리라고 해서 카페가 우후죽순 들어서는 산책 코스들을 생각해봤을 때, 이곳은 정말이지 천연기념물 수준인 가로수길이었다. 만약 일본 시골이 배경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실제 장소들을 답사한다면, 이곳이 적격이지 않을까?


저녁 시간의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저녁 시간이 되면 항상 아름답다. 흘러가는 태평양의 구름이 저 멀리서부터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주홍빛으로 물드는데, 섬이 워낙 좁아서 어디서든 이 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 일본의 가장 서쪽이자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오키나와다. 일본에서 해가 가장 늦게 뜨고 늦게 지는 곳. 젊은 사람들보다는 오키나와 원주민들과 나이 드신 분들이 더 많은 이곳. 황혼의 섬이라는 단어는 오키나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언젠가 나 역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생긴다면, 가족들을 데리고 오키나와로 오고 싶다. 아들들을 데리고 이곳에 우리를 데려오셨던 우리 부모님처럼, 이 아름다운 황혼을 나의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고 싶다. 그리고 한 때 나의 가장 큰 세상이었던 지금의 우리 가족을 추억하고 싶다. 우리 가족이 언젠가 또 다시, 다 함께 이렇게 여행을 가는 날이 올까? 괜스레 글을 마무리하며 눈물이 나는 하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