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타이베이 2016 (4)
대망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타이베이와는 작별을 고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알차게 보내고 싶었고, 여유로웠던 전날에 오늘 하루 스케줄을 꽉꽉 채워 넣었다. 첫 번째 행선지는 양명산이었다. 한국에서는 2월에 벚꽃을 볼 수 없지만, 대만의 양명산에는 2월부터 벚꽃이 개화한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벚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양명산 근처에는 천탕이라고 산속에 있는 노천탕이 있다. 비 온 뒤 축축한 날에 노천탕에서 산을 바라보며 온천욕을 즐기는 건 상상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침 일찍 출발하고 싶었지만, 오전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오늘 밤 11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짐을 미리 다 정리하고 맡겨두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오늘 들고 다닐 꼭 필요한 짐들은 빼고 옷들을 챙겨 넣다 보니 벌써 시간이 10시 30분 가까이 됐다. 이제는 양명산으로 길을 나설 때였다.
아침으로 스린 역 앞에 있는 훠궈 맛집 '구룡'에서 식사를 한 뒤, 구글맵을 통해 찾은 경로로 양명산으로 향했다.
확실히 비가 온 다음 날이라 그런지 산의 색 자체는 살짝 어둡고 축축한 감이 있었지만, 날 자체는 너무 맑았다. 바람도 너무 깨끗했고 공기도 이물질 하나 안 느껴질 정도로 청정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저 핑크빛 꽃들이 벚꽃인 줄도 몰랐다. 나름 국내에서 벚꽃이 제일 예쁜 대학교를 다니다 보니, 살짝 하얀빛을 띠는 게 정상인 줄 알았던 것이다. 돌아다니다가 한 한국인 여행객이 '저기 봐봐, 여기는 벚꽃이 분홍색이다'라고 하시는 걸 듣고 이게 벚꽃인 줄 알게 됐다. 혼자서 속으로 킥킥 웃었다. 벚꽃 보러 양명산 왔다는 놈이 코앞에 벚꽃 두고 '벚꽃이 어딨지' 거리던 게 너무 재밌었다. 여기서 또 여행의 묘미를 깨달았다. 아무리 예쁜 게 눈앞에 있어도 그것이 뭔지 모르면, 예쁜 걸 보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물론 누가 봐도 랜드마크 같아 보이는 것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마치 예전에 이스탄불에서 우연히 유명 관광지에 들어섰는데, 거기가 어딘지 몰라서 그저 평범한 사원으로만 여겼던 나 자신처럼 말이다.
산 구경하다가 산장 같은 곳에서 생강차와 간장 달걀을 먹었다. 솔직히 배불렀다. 아침에는 훠궈, 간식으로 주먹밥, 그리고 달걀이라니. 이 정도면 점심을 안 먹어도 될법했다. 보고 싶었던 벚꽃을 봤으니 이제는 천탕으로 가서 몸을 녹일 차례였다. 20분 정도를 걸어가니 화살표가 붙은 표지판에 '천탕'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한자를 배워놓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걷고 나서 보니, 만약 이 표지판을 제대로 읽지 못했더라면 꽤 고생했을 정도로 길이 엄청나게 복잡했다.
내 우려와는 달리 천탕에 방문한 사람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너무 바글바글하면 솔직히 느낌이 전혀 안 산다. 천탕의 매력은 산 중턱에서 진경산수화를 바라보며 몸을 녹이는 것이다. 사람이 많으면 그 느낌이 살 리가 만무했다. 1 인권을 지불하고 안내하는 대로 노천탕으로 향했다.
사실 내부의 모습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사진 촬영이 금지라 자제했다. 물론 안에서도 사진을 촬영하는 몇몇 분들이 계셨지만 굳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기 싫었기에 그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탕에 들어가 있기만 해도 몸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몸에 좋은 약재들을 끌어다 모아 약탕을 만든 느낌이랄까. 피부도 좋아지는 기분이고 몸에 쌓였던 노폐물이 쑥 빠져나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나른해지는 와중에 눈앞에는 울창한 계곡이 펼쳐져 있으니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날씨는 산속이라 조금 쌀쌀했고 그랬기에 더더욱 온천탕이 주는 따뜻함이 부각됐다. 비가 와서 적당히 가라앉은 산속 공기가 노천탕과 아주 잘 어울린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이대로 잠든다면 분명 좋은 꿈을 꿀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오늘이 타이베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맴돌아서 마냥 편할 수만은 없었다. 하루만 더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았을까.
한 시간 가량을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오늘 하루 먹은 것들과 시간을 생각하면 약간 이해가 안 가는 식성이었다. 꼭 여행만 오면 이 작은 몸뚱이에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들어간다. 무엇보다 온천 내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몸에 아직 열기가 남은 상태로 먹는 수수한 밥이 뭔가 감성을 자극했다. 기모노나 유카타를 입지는 않았지만, 마치 료칸에서 목욕을 마치고 방에서 가이세키 요리를 먹는 그런 감성.
불맛이 느껴지는 굴 비빔 소스와 밥을 먹자니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솔직히 소스 양에 비해 밥 양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마음 같아서는 밥 한 그릇 더 시키고 싶었지만 이러다가는 진짜 저녁에 먹을 것들도 못 먹을 정도로 배가 부를까 봐 자제했다. 사실 이때가 오늘 여행의 고비였다. 나른해질 대로 나른해진 몸에 포만감까지 더해지니 어디 드러누워 잠들고 싶었다. 눈마저 스르르 감겨오는 듯했다. 그렇다고 진짜 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고, 나는 버스에서 자는 걸 택했다. 원래는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 타이베이 시내로 갈 예정이었지만, 아예 타이베이 시내까지 가는 버스를 타면 시간은 조금 지체되겠지만 30분 이상을 잘 수 있었다. 양명산에서 일정도 다 끝났으니, 내가 찾은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말 짧고 알찬 낮잠이었다.
타이베이 시내에 도착해서 눈을 뜨니 시간은 벌써 4~5시였다. 생각보다 양명산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 다음 일정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인 시간이었다. 여행지에 가면 항상 넣는 일정이 두 개 있다. 야경 보기, 그리고 노을 보기. 야경 보기는 둘째 날 샹산에서 달성했고, 마지막 날인 오늘 단수이 강에서 노을을 보기로 했다. 타이베이 시 북서쪽을 가로지르는 단수이 강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촬영한 지역으로도 유명했다. 주인공 남녀가 자전거를 타고 가로지르던 강가에서 노을을 보는 게 얼마나 황홀할지, 내 기대치는 이미 상상 그 이상이었다. 여태까지의 타이베이에서의 경험이 다 좋았어서 무리도 아니었다.
단수이 역에서 내려서 걷다 보니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다만 조금 불안했던 건, 이쯤 되면 하늘에 나타나야 할 파스텔 톤 주홍빛 물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단수이 강에 도착했지만, 역시나였다. 날이 좋지 않아서 노을의 붉은빛을 단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날에 이럴 줄 알았으면 전날에라도 와서 볼 걸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또 막상 단수이 강을 걷다 보니 그런 생각도 줄어들었다. 단수이 강은 그저 걷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영화의 상황을 이입해서 그런지, 너무 좋았던 여행지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느낌으로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리고 노을이 없어도 오히려 푸른 하늘이 푸른 강과 잘 어우러져 슬픈 느낌을 자아냈다. Feel Blue에서 슬프다는 뜻을 지닌 Blue를 간직한 단수이 강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어디서 나온 체력인지 몰라도 단수이 강가를 한 시간 가량 하염없이 걸었다. 주변에는 여행객들보다도 현지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도 한강이라는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왜 한강에서는 이런 감수성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을까? 유럽 여행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한 번도 답을 내리지는 못 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접근성이었다. 한강은 작정을 하고 가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리고 길거리를 걷다가 조그만 골목길을 건너면 나오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한강에 가려면 한강을 가기 위해 뚫어놓은 전용 도로, 지하 도로 등등을 거쳐야만 한다. 그런 불편한 과정들이 있기 때문에 자주 안 가게 된다. 결국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다가가기 쉬워야 한다. 여행지도 사람도.
아무튼 그런 하릴없는 생각을 하며 지나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진짜 생각할수록 웃기는 하루였다. 마침 이곳에는 단수이 야시장이 열린다. 시간은 저녁 6시를 조금 넘어갈 시점이었다. 사람이 엄청 붐비지는 않지만 많은 가게들이 야시장을 열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단계였다. 너무 황홀한 치킨 냄새에 이끌려 간 가게에는 뜬금없는 대왕 오징어 튀김을 팔고 있었다. 몰랐지만 단수이 강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대왕 오징어 튀김 집이었다. 역시나 운이 좋은 하루다. 잘 튀겨진 치킨 맛이 나는 오징어 튀김을 먹으며 조금 더 걸었다. 이제는 진짜 타이베이와 안녕이다.
드디어 마지막 일정이었다. 타이베이에 가면 꼭 가보라면 맛집들이 여러 군데 있다. 그중 제일 유명한 장소가 키키 레스토랑이라는 곳이다. 사실 뭐하는 곳인지 큰 관심은 없었다. 상호명에 레스토랑이 붙어서 로컬 맛집보다는 패밀리 레스토랑 느낌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들이 가보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키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은 최소 인원 4명이 되어야 손님을 받아준다. 그래서 여행객들을 여행 카페에서 동행을 구해 이곳에 오고는 한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원래 여행 가서 낯선 사람과 억지로 만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다. 물론 자연스러운 만남은 좋아한다. 솔직히 자연스럽게 만나든 의도를 갖고 만나든 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냥 내가 그런 성향이다. 답도 없는 자만추 기질 역시 여기서 기인한 게 아닐까? 그 반대이려나?
아무튼 키키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동행이 필요했고, 나는 운 좋게 4명 모임을 만들 수 있었다. 혼자 오신 분, 나, 그리고 친구끼리 여행 온 분 두 명이었다. 약속한 시간에 레스토랑 앞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 멋쩍게 인사를 하고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막상 먹을 게 들어가니 어색함도 많이 줄어들었다. 애초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그런 어색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마침 나이도 다 비슷했고, 다들 대학생에 학교마저도 다 붙어 있어서 묘하게 편했다. 각자 대만에서 좋았던 여행지들에 대해 얘기하며 우리는 디저트도 함께 하기로 했다. 바로 스무디 하우스였다. 둘째 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만은 망고 빙수로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내가 둘째 날 너무 멀어서 가고 싶었지만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내가 가고 싶어 하던 곳을 함께 가자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융캉제에 있는 스무디 하우스에서 망고 빙수를 시켰다.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던 게 기억난다. 저녁 9시가 조금 되기 전이라 다들 디저트를 먹을 시간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 시국에는 꿈도 못 꿀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빙수를 먹고 있었다. 우리 역시 빙수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적당히 시원한 밤공기,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끼리 조심스레 피워가는 이야기꽃.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여행지 추천이었다. 두 명이서 오신 분은 여성분들이셨는데, 내가 임가화원 이야기를 하니까 매우 관심을 보이셨다. 나는 꼭 가보시라고 추천을 했고, 결국 다음날, 그분들에게 덕분에 가서 인생 사진을 건졌다는 감사의 인사가 돌아왔다. 누군가 내 추천을 받아 좋은 경험을 하고 온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10시 가까이 되자, 나는 결국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이분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미련이 길어질수록 아쉬움과 슬픔 감정도 커진다는 걸 이미 다른 여행을 통해서 많이 경험한 나다. 나 말고 다른 한 분 역시 숙소로 향했고, 낯선 자들의 만남은 3시간 만에 이렇게 끝이 났다. 어감이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정말이지, 라푼젤에서 시작한 타이베이 여행은 나흘 동안 단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여전히 내 마음속 부동의 공동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샹산에서 바라본 타이베이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그럴 때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의 ost인 '단수이 강'을 듣고는 한다. 아련한 멜로디의 기타 연주가 마음을 울린다. 샹산과 단수이 강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오히려 타이베이 가장 위쪽과 남쪽에 있는 추억과 음악이 서로 합쳐지면서 나에게 타이베이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너무 가고 싶은 곳이고, 누군가에게 추천했을 때 '타이베이 뭐 있어?'라고 반문하면 약간 발끈하고는 한다. 타이베이 첫 번째 글에는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써놨다. '동서양의 분위기가 혼재된 아름다운 곳' 뉘앙스로 소개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마지막이 되니까 오히려 깔끔하게 답이 나오는 것 같다. 타이베이에는 샹산에서 바라본 야경이 있고, 근처에는 천등의 고향인 스펀이 있고, 노천탕을 즐길 수 있는 양명산이 있고, 비 오는 날에도 거닐면 기분 좋은 많은 곳들이 있다. 이름이 대중적이지 않다고 주눅 들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경험한 타이베이는 그 이름들이 가지는 가치보다 직접 경험할 때 진가가 발휘되는 그런 곳들이었으니까. 언젠가 다시 그 도시로 가서 예류, 지우펀 등 다른 유명한 곳들도 들르고 싶다. 글을 마치며, 다시금 타이베이를 마음속에 묻어둔다.